‘관치 경제’ 망령 되살아 올라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1.0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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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실천 따른 과도한 정부 개입 우려…‘경제 정책 컨트롤 타워’ 추진도 도마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줄곧 자율 경쟁을 강조해왔다. 정부가 개입하기보다 시장 원리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국가경쟁력도 강화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그러면서도 이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해서라도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을 유독 강조했다. 유류비와 휴대전화 요금을 내려 서민 생활비를 30%까지 줄일 것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더 나아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최근 가급적 이당선인의 취임 전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면 자칫 관치 경제로 흐르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자율 경쟁을 강조해온 새 정부가 오히려 시장에 더 많이 간섭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사공일 인수위 국가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의 발언이 이같은 우려에 불씨를 당겼다. 사공위원장은 지난해 12월30일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조직 개편 작업 때 경제 정책의 기획·조정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제 정책이라는 것이 제한된 자원을 우선 순위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어서 적절한 조정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이 발언에 비추어볼 때 인수위가 새 정부 조직 개편안을 짜는 과정에서 옛 김영삼 정부 시절 재정경제원이나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기획원과 비슷하게 경제부총리 역할과 기능을 강화할 ‘경제 정책 컨트롤 타워’ 설립을 추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실질적인 경제 정책 컨트롤 타워가 없었다. 재정경제부, 총리실, 청와대 등으로 분산되어 있어 효율성이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 때문에 현재 재정경제부에 기획예산처의 예산편성권을 합치는 방안도 흘러나왔다. 관치 경제를 주도할 공룡 조직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국가경쟁력특위 사공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큰 정부를 지향하거나 관치 경제를 부활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사공위원장의 발언은 사견을 전제로 한 발언임을 강조한 뒤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냐, 관치 경제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은 상당한 오해라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새 정부가 관치 경제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시각은 여전하다. 특히 서민 생활비를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는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해보이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심화된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 등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부가 어느 정도 개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그대로 두어도 해결될 수 있지만 정부의 정책을 통해 단기간에 신속히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민 생활비를 줄여주기 위해 정부가 심하게 시장에 개입하는 시도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자칫 노무현 정부의 관치 경제를 비판해온 새 정부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같은 선상에 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마 이명박 당선인도 이 부분에 고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민 생활비 30% 인하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당선인이 자칫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도 관치 경제 부활을 경계하는 소리가 나온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라는 것이 정치권의 약속이었지만 제대로 지켜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기업인들은 “규제를 손에 쥐고 놓지 않은 채 시장에 간섭하는 것이 관치 경제라면 새 정부는 규제 완화를 강조해온 만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민 경제에 대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공적 부분은 물론 사적 부분까지 정부가 간섭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통신비 인하는 바람직해 보이지만 사실 기업 입장에서 냉철하게 보면 사적 부분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규제는 완화하는 대신 사적인 부분에도 정부가 개입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치 경제가 도래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부처 간 조정 잘 되면 효율적인 ‘정부 개입’도 가능

일각에서는 서민 경제의 핵심인 집값 안정과 물가 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의 정부 개입은 감내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여기에는 과거 정부들에서처럼 부처 간 이해관계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널뛰기식 간섭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지양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황인학 경제본부장은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시장원리에 경제를 맡기겠다는 이당선인이 관치 경제 논란이 나올 정도로 무리한 정책을 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정책을 펴면서 각 부처 간 코디네이션(조정) 기능은 필요하다. 예컨대 건설교통부·산업자원부·공정거래위원회가 같은 정책을 펴면서 다른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모양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처별·기능별로 조정 역할을 하는 조직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 경제 부처의 수장급이라고 할 수 있는 재경부가 가장 큰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재경부는 현재 정책조정·경제정책·금융·국제금융(외환시장)·세제 등 가장 많은 정책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기능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관 또는 축소 조정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당선인도 최근 재경부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지난 1월1일 인수위 시무식에서 이당선인은 정부 조직 개편과 관련해 일본 관치 경제의 대표 격인 대장성 폐지를 사례로 들며 “인수위 파견 공무원들이 부처 이익을 설득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새로운 경제 도약을 위해 경제 부처 개편이 시급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무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인수위와 관가에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나오고 있다. 가칭 ‘국가전략기획원’이 설립될 것이라는 방안에서부터 재무부가 설립되어 재경부의 세제·금융 정책 기능을 맡는 방안도 제시된 바 있다. 심지어 청와대 경제수석실 확대 방안도 있다. 그러나 인수위는 아직까지 어떤 방안에도 뚜렷한 방점을 찍지 않고 있다. 사공위원장은 구체적인 개편 방안에 대해 “현재까지 나온 안이 아무것도 없다. 경제 관련 각 부처가 업무 보고한 내용을 가지고 본격 논의해야 할 단계이므로 현재까지 거론되는 것은 ‘설’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에 따라 새 정부의 정책이 관치의 수준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새 정부의 경제 정책 핵심은 규제를 강화하기보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 환경을 좋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서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여러 부문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직접적인 간섭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최근 “경제가 민간 자율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지만 경제의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는 ‘관 주도’가 아닌 ‘국가 리더십’에 해당한다”라고 설명했다. 과거 정부의 관치 경제를 강도 높게 비판해온 이명박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주요 정책에 개입할 소지가 있음을 드러낸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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