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생들 “학교 쇼핑은 즐거워”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01.2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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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할 곳 찾아 명문교 순례…학교측은 후한 접대로 ‘학생 쇼핑’

 
"태평양 연안의 워싱턴 주에 사는 에밀리 존슨 양(14)은 최근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로 여행했다. 이른바 학교 쇼핑 여행이다. 이 여행에는 아버지가 동행했다.
에밀리의 학교 쇼핑은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있는 사립 명문 고등학교 대처 스쿨과 인근 산타바바라에 있는 케이트 스쿨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고향에서 다니는 중학교에 결석 신고를 하고 수업을 한 주일씩 빼먹으며 치른 여행이다. 에밀리는 이들 학교 입학 사정 담당들과 면담하고 학교 시설과 교육 현황을 둘러보았다. 에밀리는 2008학년도 고교 진학을 위해 이미 이들 학교 외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다른 사립학교들도 돌아보았다. 대처 스쿨이 에밀리의 6번째 쇼핑 학교였다. 1백70㎝에 육박하는 훤칠한 키에 순박한 모습과 차림을 한 에밀리는 자신이 방문한 학교의 장·단점을 비교하기 위해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미국에서 학교 쇼핑은 주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공립학교는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교육구청 단위의 학교 배치 원칙에 의해 학생들의 진학이 결정되지만 사립학교는 지역과 교육구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대처 스쿨이나 케이트 스쿨에는 미국 내 30여 개 주에서 학생이 몰려든다. 학교 쇼핑은 동부 명문 사립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사립학교에는 매년 에밀리 같은 학교 소핑객이 몇백명씩 몰려온다.
학교 쇼핑객의 요구에 부응해 학교측의 고객 접대는 정중하고 각별하다. 방문 학생과 학부모 접대도 웬만한 고급 사무실에 버금가는 멋진 응접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학교 시설과 학교 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비행기로 몇 시간을 여행해 찾아간 입학 지원생과 학부모들이 헛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배려한다. 학교 안내 브로셔는 웬만한 한국 대기업의 홍보 자료에 못지않게 고급이다. 식사 시간이 되면 방문 학생과 학부모에게 교내 식당에서 식사 대접도 한다. 학교 직원들의 태도 역시 친절하고 정중하다.

학교·학생 모두 선택 까다로워 서로 경쟁하는 셈

로스앤젤레스의 노스할리우드에 위치한 명문 사립고교 하바드 웨스트레이크 스쿨은 지난 1월12일 학교 안내 행사를 열었다. 지난해 9월부터 매달 2, 3차례 계속되는 이 행사에는 매번 100명에서 1백50명의 학생과 학부형이 참가했다. 행사는 학교 시설 안내를 마친 뒤 학교 운영 설명회, 교과과정 설명회 등에 이어 재학생들을 단상에 불러 학부형들과 학생들의 학교 생활에 대해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학교 입학 사정 담당 직원들은 이날 행사에 참여한 입학 지원 학생에 대한 면담도 실시했다. 행사가 끝나면 나무 그늘이 넓게 깔린 교정에서 간단한 메뉴이기는 하지만 뷔페식 식사가 풍성하게 무료로 제공되었다.
이같은 학교측의 설명회나 접대는 거꾸로 학생 쇼핑인 셈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좋은 학교 또는 자신에 적합한 학교를 선택하는 쇼핑에 열심인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측도 좋은 학생을 다른 경쟁 사립학교에 빼앗기지 않고 자기 학교로 오도록 하기 위해 학생 쇼핑에 최선을 다한다.
또 좋은 학생을 고르기 위해 입학 사정 절차도 까다롭게 정해놓고 있다. 에밀리의 경우 6개 학교에 모두 지원서를 제출하려면 사립학교 수능고사는 기본이고 지난 2년간의 중학교 성적과 학생기록부를 제출해야 하는데, 지원서 작성만 해도 학교마다 7~8페이지씩에 이른다. 그리고 자필로 에세이를 2편은 써야 한다. 6개 학교에 지원할 경우 각각 제목이 다른 에세이를 최소한 10건을 준비해야한다. 학생이 학교 고르기도 까다롭지만 학교가 학생 고르는 절차도 마찬가지로 까다롭다.
학교와 학생이 서로를 쇼핑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교육이 완전한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미국에서 보면 이는 부질없는 일처럼 보일 뿐이다.
미국의 교육은 확연하게 공립과 사립으로 구분되어 있다. 공립학교는 국민에 주어진 교육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공급하는 교육 시설이고 사립학교는 각 사립학교 재단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이다.
공립학교는 엄격한 법 규제 속에서 학교 배정과 교과가 시행되고 있고 공부 성적이 좋지 않거나 수학 능력이 부족한 학생에게도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예산과 시설, 시간을 제공한다. 그 대신 공립학교 특히 공립 고등학교의 교육 목표는 명문대학에 더 많은 학생을 진학시키는 데 있지 않고 최소한의 소양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다.

 

공립·사립 윈윈 하며 교육 정상화…한국 교육 현실에 ‘타산지석’

공립고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전국 평균 30%선을 밑도는 데도 교육 위기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일부 언론이나 교육 전문가들이 미국 공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을 요구하지만 이는 최소한의 교육 기회 제공을 좀더 효율적으로 하자는 수준에 머무른다.
사립학교 특히 명문 사립고교 역시 교과 과정은 법으로 제정된 기준을 따르지만 최저 또는 최소의 기준이 아니라 주로 최고·최대의 기준을 마련한다. 아이비 리그 등 미국의 명문대학이 주로 사립 대학들이고 이들 사립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 대다수는 명문 사립고교 출신이다. 이들 미국 명문 사립 대학들이 미국을 이끌고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을 양성한다면 미국의 명문 사립고교는 사실상 미국 장래를 위한 우수 인력의 공급을 맡고 있는 셈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은 웬만하면 자녀를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로 보내려고 한다. 공립학교의 교육 수준이 명문대학을 지향하기에는 너무 낮다는 불만도 있지만 학내 범죄가 만연한 공립학교보다는 교내 생활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수준 높은 사립학교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 사립학교가 모두 돈 있는 집안의 학생들만 모이는 곳은 아니다. 우수한 학생의 경우 가난해도 사립학교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제공된다. 재정이 튼튼한 각 사립학교는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학부모의 경제 능력에 따라 전액 장학금을 제공하거나 학자금 융자 제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지도한다. 겉보기에는 돈 많은 사람들의 돈놀이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미국 사립학교를 둘러싼 메커니즘은 어느 학교가 더 우수하고 어떤 학생이 더 우수한지에 따라 결정되는 교육 시장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미국 사립고교들은 명문대학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사립학교는 시설과 교육의 질적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학교에 따라서는 시설이나 교육 수준이 공립학교에 훨씬 못미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로스앤젤레스 인근 패서디나의 한 사립고교 M스쿨은 명문으로 소문이 나 있지는 않지만 부자 동네에 위치해 지역 내의 부잣집 자녀들만 모아 가르치는 작은 규모의 고급 학교이다. 부자들이 자녀를 보내는 학교에 걸맞게 학교 출입구가 한국 최고 재벌가들의 별장 출입문이 무색할 정도로 웅장하다. 이 학교 본관 건물은 들어가면서부터 바닥이 대리석으로 깔려 있다. 교내 수영장은 기본이고 학교 전체가 짙은 숲으로 덮여 있다. 학교 생활에서 자연과 학창 생활의 운치를 함께 만끽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부유층 부모들이 원하는 교육 수요에 맞춘 부자용 맞춤 학교인 셈이다.
또 로스앤젤레스 남쪽에 있는 다른 사립학교는 예능에 뛰어난 학생들을 모집해 가르친다. 한국의 예고와 비슷하다.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한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에서도 손을 내젓는 문제아들만을 모아 가르친다. 이처럼 미국의 사립학교는 공립고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다양한 종류의 교육 시스템을 마련해서 다양한 수요에 부응한다. 미국에서 공립학교 못지않게 사립학교의 존재가 중요한 까닭은 이같은 다양한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데 있다.
한국의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논란은 영재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교육 기회 균등 문제와 사교육비 증가 등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찬반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교육 쇼핑이 자유롭고 보편화된다면 그런 논쟁이 필요없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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