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아버지는 감옥이었다
  • 김유미 (연극평론가) ()
  • 승인 2008.05.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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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골목길의 번역극 <포트> / ‘낯선 작업’ 배우들의 내공으로 무난하게 소화시켜

 
연출가 박근형이 이끌고 있는 극단 골목길은 그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색깔이기도 하다. 골목길의 배우들은 힘을 모두 빼고 있다가 항상 관객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에너지를 발산한다. 극단 골목길은 이러한 배우들을 가졌기에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도 가장 사실적인 연극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 <포트>는 1971년생인 영국의 젊은 작가 사이먼 스티븐스의 2002년 작품이다. 주로 창작극을 공연해온 골목길로서는 다소 낯선 작업일 듯싶다. 그런 점에서 골목길의 번역극 작업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현재 우리의 상황 속에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게 다가왔다. 이는 원작이 지닌 보편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극단이 워낙 현재 우리의 문제에 집중해왔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골목길 배우들의 내공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저력이 특히 돋보였던 골목길 배우들로 윤제문·박해일·고수희를 들 수 있고 이번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 중에서는 김영필·박민규를 들 수 있다. 박민규는 주로 조연을 맡았지만 <청춘예찬> 때부터 작품의 느낌을 제대로 살린 배우였고, 김영필은 <경숙이, 경숙 아버지>에서 골목길 선배 배우들의 스타일을 학습한 듯 골목길 단원으로서의 색깔을 마음껏 발산해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번 작품 <포트>에서도 이 배우들은 그들의 몫을 다했고, 김영필의 경우에는 허우대 멀쩡한 괜찮은 남자로 보이지만 내면은 결코 괜찮지 않은 예의 그 캐릭터를 역시 잘 소화해냈다.

그런데 이번 작품 <포트>는 극단 골목길만의 배우들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레이첼 역의 장영남과 대니 역의 이승준은 골목길 단원이 아니다. 하지만 골목길과의 작업이 처음이 아닌 만큼 다른 배우들과 균형을 잘 맞추어 골목길의 분위기 속에 잘 스며들고 있다. 장영남은 장영남 자체로 개성이 강한 배우라고 할 수 있고 그만큼 다양한 역할 속에서도 그녀만의 고유함을 잃지 않았는데 <포트>에서는 열두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의 변화를 비교적 과장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안정되게 이끌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반항적이지 않은 인물이 이승준인데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작품을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무난하게 수행했다. 레이첼의 동생으로 나온 빌리 역의 김주완은 젊은 단원이지만 골목길 배우로서의 자질, 불안정함과 거칠음을 지녔어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인물을 드러내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청춘예찬>의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 보여줘

골목길 단원들이 모두 잘하는 연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문제아 역할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문제아들의 모습에는 불량함이 매우 적절하게 그리고 꽤 강도 높게 표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그들에게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골목길 배우들에게는 관객들이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인물들을 매우 따뜻한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 작품 <포트>에서도 정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레이첼과 빌리의 아버지(김영필 분)다. 그는 간접적으로만 등장하지만 레이첼과 빌리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 남편을 못 견뎌 하다가 집을 나가는 엄마,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걷다가 감옥을 드나드는 생활을 하게 되는 빌리는 이를 가장 단순하게 반영해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레이첼을 통해서다. 레이첼이 아버지와 똑같은 남자 케빈과 결혼해 그 불행의 절정을 전시할 때 관객은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을 확인받게 된다.

골목길의 대표작 <청춘예찬>에서도 이러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무능력하고 술만 마시는 아버지, 그래서 결국 엄마가 집을 나가게 만드는 아버지 말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아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다르다.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극복하는 방법의 차이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말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까지 매우 비슷하다.

이 작품을 보면 영국이나 한국이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삶의 이야기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가족이 사회적 위험 요소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족 자체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처럼 위험하다. 가족 구성원들이 어디에서도 위안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레이첼은 성장하면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그것이 레이첼을 위한 정답으로 제시된다. 이 부분이 연출가 박근형이 직접 쓰고 연출한 <청춘예찬>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청춘예찬>의 아버지는 아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다. <청춘예찬>에서는 좁은 방에서 새 가정을 이룬 아들 내외와 아버지 이렇게 세 식구가 함께 견디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적 차이, 아들과 딸의 입장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아버지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래도 <청춘예찬>에서의 보잘것없는 야광별이 보여주었던 궁색한 희망이 좀더 짠하게 다가온다. 변화되어야 하는 당위보다는 변화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비비적거리며 살아내는 인물들이 못났지만 우리 자신과 더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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