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의 오기 속셈이 있었네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06.0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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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흑인 테러로 오바마 유고시 “내가 대안” / 남편 그늘 벗어나 정치적 독립도 노려

미국 언론들은 요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을 보도하면서 승자인 버락 오바마보다는 패자인 힐러리 클린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지면도 클린턴에게 더 할애한다. 유권자의 지지라는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에게 여론의 관심은 승패의 갈림길에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번 미국 민주당 예비선거의 경우 클린턴은 패자이지만 인기도에서는 승자나 다름없다.

‘정신적 승자’인 클린턴에게 여론이 쏠리는 것은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이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과 맞대결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은 아니다. 패자 클린턴이 다음 행로를 어떻게 잡느냐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 승자에게는 극복해야 할 다음 고비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지만 결정하는 데 그리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자에게는 선택의 폭이 좁고 방향이 정해져도 가는 길이 험난하다. 패자는 자신에게 닥친 정치적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이 클린턴의 위기 관리 능력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클린턴은 민주당 후보 지명전이 사실상 막을 내리는 몬태나, 사우스다코다 등 6월3일 열리는 2개 주 예비선거의 승패와 관계없이 오는 8월25일부터 사흘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리는 전당대회까지 포기 선언을 하지 않을 태세다. 전당대회까지 가서 결과를 보지 않고서는 패배를 승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오바마는 이미 전체 대의원의 절반 이상을 확보해 사실상 2008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뒤집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주변 분석에도 클린턴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클린턴의 버티기는 돌발 사태에 대한 기대 때문

클린턴의 버티기는 집요하다. 그리고 클린턴이 이처럼 끈질기게 버티는 것은 자신이 판세를 뒤집을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외부 여건으로 사태가 돌변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 기대가 무엇이냐를 두고 미국 언론들은 클린턴을 복잡하게 바라보고 있다.

첫째는,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징계로 후보 선출권을 가진 대의원을 오는 8월 전당대회에 보내지 못하게 된 미시건 주와 플로리다 주 대의원의 자격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 여부는 아직도 변수로 남아 있다. 미시건과 플로리다주 민주당지부는 DNC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비선거 날짜를 통상적인 날짜보다 앞당겨 실시했다가 징계를 받았다. 이들 2개 주에서 오바마에게 모두 승리한 클린턴은 문제 대의원들의 자격이 살아나 그들의 지원을 받는다면 전당대회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아직 전당대회의 커다란 변수인 수퍼대의원의 기류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계산도 하고 있다.

클린턴은 “플로리다와 미시건 2개 주 대의원의 뜻을 전당대회에서 반영하는 것은 당 규정을 바꾸는 조치이기는 하지만 이들 대의원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후보 지명자가 전체 당원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선거의 규칙을 동시에 어기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당의 규정이 우선이냐 선거의 규칙이 우선이냐를 시비의 대상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정치 분석가들은 DNC의 최종 결정이 어떻게 나든 이번 판세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둘째는, 후보 지명자 대안론이다. 클린턴은 승자 오바마에게 전당대회 이전에 유고 상황이 발생할 경우 자신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인 오바마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될 경우 반 흑인 테러에 직면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큰 바위 얼굴’이 새겨진 산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성을 검토하다가 포기 선언을 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흑인인 파월이 백악관을 포기한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반흑인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토사령관과 걸프전쟁 합참의장 그리고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파월이 훌륭한 대통령감이라는 워싱턴 정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색인으로서의 한계를 의식해 물러났다.

클린턴은 최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사건을 거론해 암시적으로 오바마의 유고 가능성을 시사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현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형으로서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으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해되었다.

오바마측은 즉각 클린턴이 로버트 케네디 암살 얘기를 꺼낸 것은 불순한 동기와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비난했다. 클린턴은 민주당 내부는 물론 워싱턴 정가로부터도 이 발언과 관련해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클린턴측은 바로 사과와 해명에 나섰지만 많은 여운을 남겼다.

셋째는, 차기 도전론이다. 올해 선거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에는 2016년, 존 매케인이 승리할 경우에는 2012년에 클린턴은 분명히 백악관에 재도전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클린턴이 차기를 노린다면 이번 예비선거의 실패에서 커다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정치 관측통들은 분석한다.

“차기, 차차기 대권 도전할 것” 분석도

클린턴은 TV 토론 대결에서 오바마가 중앙 정치 초년생임을 거듭 강조했지만 클린턴 역시 본격적인 정치에서는 오바마와 큰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클린턴은 민주당 상원에서 재선 기준으로 당내 의원 49명 가운데 서열 36위로 초선인 오바마의 39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클린턴은 예비선거 기간 내내 자신의 오랜 정치 경험을 강조했지만 남편 빌 클린턴의 후광일 뿐 실제 정치에서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비판도 받았다.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와 대통령을 지내면서 퍼스트 레이디로서 정치판을 엿볼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정치 활동은 하지 못했다. 지난 2001년 상원 진출이 실질적인 정치 경력의 전부다.

워싱턴 포스트의 대표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엔은 “클린턴이 이번 예비선거에서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남편 후광으로 이름을 얻은 정치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독립 쟁취와 같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큰 정치인으로서 강인함과 굳은 의지를 실험하고 과시하는 데 이번 예비선거 패배가 매우 중요하다는 치밀한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통령 자리에 재도전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정치 그늘에서 벗어나 나약한 여성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중도 포기는 이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만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 코엔의 분석이다.

워싱턴의 다수 정치 분석가들은 클린턴의 뉴욕 주지사 출마 가능성도 점친다. 미국 역대 대통령의 상당수가 워싱턴 본바닥 정치인 출신보다는 주지사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멀리 로널드 레이건에 이어 지미 카터, 빌 클린턴 그리고 현재의 조지 부시 대통령 등이 모두 주지사 출신이다.

주지사 경력 역시 클린턴의 정치적 독립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넷째로는, 클린턴의 원만한 상원 복귀를 위한 포석이라는 소리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상원의 당내 서열 36위인 클린턴이 예비선거 패배 후 상원으로 돌아갈 경우 대통령 후보 도전자와 상원 말단 의원이라는 정치적 입지의 간극은 매우 크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예비선거전과 상원 복귀의 중간 기간에 자신의 정치적 비중을 확실하게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간극을 적절하게 매우지 못할 경우 클린턴의 차기 백악관 도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전망도 있다. 따라서 전당대회까지 클린턴은 정치인으로서의 당내 위치를 굳혀야 한다. 클린턴의 버티기는 당장 백악관을 향한 것이 아니라 상원을 향한 것이고, 백악관을 멀리 내다보는 전략의 결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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