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총성에 머리 아픈 세 사람 ‘현대’가 뭐기에…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07.2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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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피격 사건으로 세 사람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대북 관계 경색을 우려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속내가 ‘현대’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5년전인 2003년 8월4일 새벽.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죽음은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이라는 최대의 위기 속에 현대그룹을 맡은 현정은 회장은 최근 남다른 감회로 남편의 추모 5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대그룹 신입사원의 금강산 수련회와 비로봉 관광 개방 확대로 그룹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주변의 우려와 숱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그룹의 안착을 바탕 삼아 ‘사모님’에서 ‘회장님’으로의 완벽한 변신을 선언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건이 5년 만에 또다시 반복되었다. 7월11일 새벽 금강산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현회장뿐만 아니라 현대가(家)와 이명박 대통령에까지 그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재계 주변에서 ‘현대아산 죽이기 시나리오’ ‘정씨 현대 복원설’ 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잠복 중이던 현회장과 정씨 일가의 ‘현대가 적통’ 논란이 다시 불붙는 듯한 분위기다. 여기에 ‘뜨거운 감자’인 현대건설 인수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현회장과 정몽준(MJ)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재격돌을 예고하는 등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당장 현회장이 야심차게 준비하던 ‘뉴 현대그룹’ 프로젝트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에 반드시 성공해 정주영-정몽헌으로 이어지는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 사업 전면 중단으로 현대아산의 존폐 위기마저 거론되는 상황에서 현대건설 인수 계획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지적까지 낳고 있다. 반론도 있다. “현대가 갖는 성격상 단순 시장 논리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다. 전 정권과 현 정권 그리고 북한까지 포함되는 다각적인 정치적 의미를 말한다.

최대의 관심사는 단연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이다. 현대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이대통령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현-MJ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특히 지난 7월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서 현대아산의 책임 소재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대그룹측은 대통령의 정확한 속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여러 해석을 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이명박 정부의 탄생에 대해 태생적인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사업 성격상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와의 밀착 관계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현회장이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현대건설 인수 건을 선점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인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래도 노무현 정부가 MJ 쪽보다는 자신에게 더 우호적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실제 현대그룹 내부에서는 비선의 데스크포스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구성원의 면면이 노무현 정부에 관여했거나 가까운 인사들로 채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난해 12월 초 MJ가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이후 보수 정권이 탄생하면서 위기감은 증폭되었다. 그나마 현대 내부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이대통령의 ‘중립성’에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당시 현대그룹의 TF팀에 간여했던 ㄱ씨는 “일각에서는 MJ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이대통령이 현회장과 MJ의 싸움에서 MJ 쪽에 기운 것으로 보는데, 그야말로 1차원적인 사고다. 이대통령은 최소한 현대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섣불리 한쪽 편에 설 수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의 발언 속에는 이대통령과 MJ 사이에 해소되기 힘든 뿌리 깊은 앙금, 그리고 현회장 쪽에서도 이대통령에 대해 만만찮은 ‘뭔가’를 갖고 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현대그룹, 보수 강경파가 헤게모니 잡을까 우려

현대그룹측이 걱정하는 것은 이번 사건으로 보수 강경 세력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는 것이다. 이미 청와대와 정부 내에서는 ‘매파’가 다시 ‘비둘기파’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나섰다. 지난 5월 옥수수 5만t 지원 제의를 시작으로 다소 유화적인 움직임으로 돌아섰으나, 피격 사건으로 다시 보수 강경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나선 것이다. 지지도가 추락한 이대통령은 아직 확실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끌려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보수 강경 세력이 여전히 이대통령의 이념에 대해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대선 때 이명박 캠프의 국방 분야 외곽 조직에서 활약했던 한 예비역 장성은 지난 3월 기자에게 이대통령의 통일·국방 정책에 대해 “이대통령이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국방 개혁에 대한 인식은 솔직히 노무현 정부 쪽에 가깝다”라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는 “이대통령은 ‘실용’을 강조하기 때문에 북한과 쓸데없이 긴장 관계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북 사업은 실용의 관점에서 우리 경제에 유리한 측면이 많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국방 개혁 역시 이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처럼 비용을 절감하는 과감한 내부 개혁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 공감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정부 초기 자신의 지지 세력인 보수 강경파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갈수록 ‘실용’ 우선 쪽으로 자기 색깔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었다. ㄱ씨는 “문제는 지금껏 현대아산이 차지하고 있던 대북 사업의 독점권이 이참에 깨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데 쏠려 있다”라고 우려했다. 현 정부가 현대아산의 남북협력자 승인을 취소하는 방법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 등을 전면 중단시키거나 구도 자체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 정부로서는 일개 기업인 현대아산이 지나치게 북한과 밀착되는 것 또한 마뜩찮을 것이다. 마치 정부를 제쳐두고 기업이 북한에 대한 고급 정보를 더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참에 현대아산과 북한의 핫라인을 끊으려고 할 수도 있다”라고 밝혔다.

▲ 이명박 대통령이 1992년 정주영 회장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그룹의 관계자인 ㄴ씨는 “일각에서 말하는 대북 사업 독점 횡포 운운은 말이 안 된다. 대북 관광 사업은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 소요되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북측으로부터 사업권을 따낸 현대만의 개척 사업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현대아산을 마뜩찮게 바라보는 보수 세력들이 독점의 폐해성을 지적하고 나선다면 솔직히 우리로서는 최악의 카드가 될 것이다. 이미 지난 노무현 정부 때 대북 사업의 미래성을 감지하고 참여 열망을 드러낸 롯데관광 외에도 통일교, 김윤규 전 현대아산 회장 등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 이대통령의 선택은?

이대통령이 애써 침묵하더라도 정몽준 최고위원이 본격적으로 한나라당의 실세로 등장할 경우, 현대그룹이 더 큰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혜 시비 등을 고려해서 MJ가 당장 현대건설 인수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대북 사업에 타격을 주는 방법으로 현대그룹을 서서히 압박하는 카드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MJ의 대항마로 ‘박근혜 카드’가 거론되는 것은 흥미롭다. ‘친박’ 세력의 좌장격인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현회장의 외삼촌이기 때문이다. 김의원의 존재는 ‘대권’을 꿈꾸는 MJ와 이래저래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현대가의 내부 사정은 청와대에 이어 한나라당에까지 파급을 미칠 정도로 간단치 않다. ㄱ씨는 “이대통령과 MJ가 지금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MJ가 자기 필요에 의해서 이대통령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1992년의 일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이대통령의 정치 선배라고 생각하는 MJ는 누구보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이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오히려 이대통령은 ‘왕자님’ 같은 MJ보다는 성격이 소탈했던 MH(정몽헌)에 평소 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실제 2003년 8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대통령은 정몽헌 전 회장의 빈소에서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정최고위원 역시 지난해 12월 한나라당 입당 직후 기자회견에서, 불화설이 나돌던 두 사람이 화해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사람들 감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나. 복합적 감정이다. 아버지와 이후보는 서로 상대편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서로 고마워하는 사이가 아니었나 싶다”라고 말했다. MJ로서는 자신이 이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적인 표현을 한 셈이다. 그동안 쌓여온 감정적 앙금은 여전히 담은 채였다.

현대그룹에 몸담았던 한 기업인이 지난해 초 기자에게 전한 에피소드는 양측의 불신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2005년 말께인가. 이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자신이 집에서 기르는 애견 두 마리의 이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 개 이름이 뭔지 아는가. ‘몽실이’와 ‘몽돌이’라고 했다. ‘푸근하고 정감이 가며, 부를 때마다 입가에 맴도는 느낌이 좋다’라고 썼더라.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만, 난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왕회장의 아들들이 ‘몽’자 항렬을 쓰는데, 거기에 개 이름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나도 그런데 당사자인 그들은 어땠을까”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현대그룹 주변에서는 현회장과 이대통령 간의 연결 고리도 만만찮음을 과시하고 있다.

ㄴ씨는 “현회장과 영부인인 김윤옥 여사는 이화여대 선후배 사이로 사회적 활동과 모임도 함께 하는 등 평소에 가깝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현대아산 임원을 비롯해 현대그룹 임원 중 현대건설 출신이 상당히 많다. 그들 대부분 이대통령과 현대건설에서 함께 부대낀 인사들이다. 특히 이대통령의 현대건설 사장 시절 비서실장으로 6년간이나 최측근에서 모신 노치용 현대증권 부사장은 현회장의 핵심 측근으로 있다”라고 말했다. 이대통령의 현대 시절 인맥이 대부분 현대그룹에 남아 있어 친밀감에서 오히려 앞선다는 자신감이다.

현대그룹측에서 많은 얘기를 하는 것은 그만큼 현 상황이 수세 국면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MJ는 짐짓 무관심한 투다. 명분이나 자금력이나 또 정치적인 힘에서도 모두 우위라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한때 정주영 명예회장의 ‘양자’로까지 불리며 정씨 일가 가족 행사에도 참여했던 이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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