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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으로 가야 한다

오바마 시대 미국의 세계 전략 / 국제 사회 관통할 철학적 기조는 ‘정치적 이상주의’…오바마 “새로운 리더십의 새 아침이 밝았다”

진병기 (내일신문 기자) ㅣ 승인 2008.11.11(Tue) 14: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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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헬리콥터를 타고 이라크 현지를 돌아보고 있다. 오바마는 오는 2010년 5월까지 이라크 주둔 미군을 조기 철군시킬 계획이다.
ⓒAP연합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21세기 정치적 이상주의’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오바마가 약속한 미국과 세계의 새로운 관계를 근저에서 관통할 철학적 기조가 될 전망이다. 제3의 길을 주창한 앤서니 기든스는 21세기의 세계는 정치적 이상주의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범지구적 과제를 안고 있다고 갈파했다. 그는 국가와 국가의 이해관계 대립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촌이 안고 있는 공동의 과제들, 환경·기후 재난, 인종과 종교 갈등 등이 정치적 이상주의의 과제라고 못 박았다.

기든스는 ‘정치적 현실주의’ 때문에 유권자들의 정치 혐오증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은 정치적 현실주의를 상징했다. 9·11 테러라는 희대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테러집단과의 대결이라는 ‘정치 현실의 굴레’에 갇혀 추락했다. 반면 오바마는 100년 만의 투표율 최고라는 유권자들의 참여 열기 속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 기록적인 투표율이야말로 이번 미국 대선이 정치적 이상주의로 들끓었다는 증거이다.

오바마는 당선 연설에서 “해외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우리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으며 미국의 새로운 리더십의 새 아침이 밝았다고 말씀드린다”라면서 환경과 금융 위기라는 두 개의 전쟁과 당장 맞설 것이라고 말했다. “냉소주의와 많은 의혹들이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는 말로 끝맺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러나 누구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 숙명을 타파하려는 신념을 의미한다. 인종 차별 철폐는 정치적 이상주의의 대표적인 과제였다. 오바마는 스스로 이를 돌파했고, 전세계에 ‘We can do it!’을 외치고 있다.

기후 변화, 인권·종교와 인종 갈등 해결이 첫 번째 키워드

   
▲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의 연설을 듣고 있다.
ⓒAP연합

오바마 시대의 세계 질서를 관통하는 첫 번째 키워드인 정치적 이상주의를 실천하는 수단은 ‘소프트파워’이며 정책 내용은 ‘기후 변화, 인권·종교와 인종 갈등의 해결’이다. 그 결과 표현될 국제 관계의 외형은 ‘다자주의 시대의 전개’이다. 유럽연합(EU)은 11월3일 미국의 새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라고 강조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역사의 시계추는 다자주의로 돌아가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기존의 ‘국가와 국가 간의 국익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경쟁 대립 패러다임’으로는 오바마 시대의 세계 질서를 논할 수 없다. 오바마의 등장으로 세계는 비로소 20세기 체제가 청산되고 21세기 세계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제1 외교 파트너인 유럽연합이 오바마의 당선에 대해 거는 첫 번째 기대가 바로 전지구적 난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이상주의의 구현이다. 유럽 국가 지도자들은 기후 재난, 종교·인종 갈등, 인권 문제 등을 해결할 것을 주문하는 환영 성명을 냈다. 오바마는 신대서양 연대를 그의 대외 정책 맨 앞줄에 내세우며 유럽과의 협력을 다짐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조지프 나이 교수는 “오바마의 외교는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는 하드파워가 아닌 동의와 호감도를 높여 스스로 동참하도록 만드는 소프트파워 외교는 정치적 이상주의의 실천과 맞물려 있다.

나이 교수는 “9·11 이후 미국은 세계에 희망과 긍정이라는 가치를 전파하기보다 공포와 분노를 표출해왔다. 이제 미국은 공포보다는 희망을 수출해야 하며 차기 대통령은 이같은 대외정책을 최우선 의제로 삼아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에 대해 “영국은 최근 이 표현의 사용을 금지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테러 조직에 가담하는 사람의 수가 오히려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반테러 전쟁을 외교 정책의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조지프 나이 교수의 주장은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시대의 세계 질서를 내다보는 두 번째 틀은 경제와 안보 관계가 한 묶음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점이다. 극단적으로는 기존 동맹도 경제적 협력과 맞물리지 않으면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경제 협력이 강화된 국가 관계는 안보 측면에서도 협력이 튼튼해진다. 대표적으로 4조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대결에서 협력으로 빠르게 바뀔 것이라는 전망을 부인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예일 글로벌’은 “오바마는 미국 금융 기관의 공적자금 투입에 필요한 ‘돈줄’인 신흥 강국 중국과 산유국들에게 좀더 큰 권한을 주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경제와 안보 한 묶음으로 재편시킬 듯

중국의 전문가들도 이에 대해 의견이 일치한다. 베이징 대학 국제관계학원 자칭궈 부원장은 ‘초천도시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위상이 강화되고 파트너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짐에 따라 중국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성숙하고 합리적으로 변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오바마는 외교에 경험이 별로 없지만 그의 외교 참모진에는 중국에 대한 식견이 뛰어난 인사들이 많다”라며 오바마 진용에 친중파가 많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는 “미국이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고서 어떤 강경책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중국 포털 사이트 왕이의 평론원 천원선 씨는 “상원 외교위원장을 지내 외교에 정통한 조지프 바이든 차기 부통령이 오바마 정부에서 대외 관계를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은 ‘중국이 맹방은 아니지만 우방이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중국에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에 대해 포위·고립 전략을 추구했던 ‘네오콘의 악몽’은 먼 옛날 얘기가 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중국 쪽 전문가들 사이에서 넘쳐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밀월이 예고되면서 긴장하는 나라가 러시아와 일본이다. 일본 자민당은 매케인의 집권에 대비해 아소 내각을 출범시켰다는 분석이 대두될 만큼 오바마의 정책 기조와는 거리가 멀다. 과거 고이즈미 총리가 사전에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기원함으로써 밀월을 구가했던 전례와는 정반대로 아소 내각은 존립의 위기로 몰리고 있다.

미·중 밀월 가능성에 러시아·일본 촉각

   
▲ 유럽 연합 정상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이 기념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EPA

오바마가 기본적으로 미·일 동맹을 동북아의 기본 관계로 중시하겠지만 아소 내각과의 관계가 원만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더 크다. 아소 총리는 외무장관 시절부터 미국 공화당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나, 민주당 내 인맥은 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오바마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환영하는 등 대화 중시 노선을 표명한 데에도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취임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총리의 지지율이 40%대로 주저앉은 것은 일본정치사에서 극히 드문 사례로 꼽힌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은 “자민당의 55년 체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라며 고고성을 울리고 있다.

이 때문에 내각제 국가로서 국가 지도력을 유연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일본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오바마 후폭풍’으로서 세계로부터 주목되고 있다.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소속인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매케인 진영에는 지일파가 많았고, 오바마 참모진에서는 지중파가 더 강하다”라고 전했다. 매케인은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공약했지만, 오바마는 일본의 동북아에서의 역할에 대해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오바마 정부가 중국과의 밀월을 구사하게 되면 동북아에서 일본의 역할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러시아는 푸틴의 막후 역할이 계속되는 가운데 과거 미국과 세계 슈퍼파워로 경쟁했던 영화를 되찾으려는 기세가 노골적이다. 매케인이 집권했더라면 러시아의 도전은 매우 거칠게 터져나왔을 뻔했다. 매케인은 러시아를 적대적 국가로 분류하는 정강 정책을 채택했다. 반면 오바마는 ‘친구도 적도 아닌 일면 협력, 일면 견제’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오바마 당선에 맞춰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 방어 체제에 대항해 전파 방해 기술을 동원할 계획이라는 국정 연설을 단행했다. 오바마가 부시의 기존 러시아 포위 전략을 계속 구사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을 던진 셈이다.

박상남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러시아는 냉전 붕괴 이후 미국이 자국을 진정한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나토(NATO)의 영향권을 러시아의 국경까지 확장해왔으며 동북아시아에서도 일본 등과 함께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고 있는 데 대해 반감이 크다. 이미 두 나라는 그루지야에서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일전을 겨룬 바 있다”라고 말했다. 박교수는 “러시아는 오바마가 합리적이며 ‘합의 가능한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고, 미국도 금융·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러 관계는 부시 정권 때보다 개선될 것으로 전망한다”라고 말했다.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소속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오바마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를 대등하게 경쟁시킴으로써 두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취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국제 공조 해치는 보호무역주의는 택하지 않을 듯

일부에서는 오바마가 보호무역주의로 미국의 경제 위기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자주의 구도에 맞지 않다. 경제와 안보가 한 묶음으로 전개되는 국제 관계의 재편 과정에 다자주의의 원칙이 더욱 정밀하게 적용될 전망이다. 자유무역이냐, 보호주의냐 하는 ‘국익을 최상위 범주로 삼는 정책 틀’로는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미국의 경제 위기는 국제 공조가 없이는 해결할 수 없으므로 오바마는 국제 공조를 해칠 수 있는 보호무역주의를 전면에 내걸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우세하다.

미국이 통화 스와프 협정을 세계 각국과 체결한 것은 일종의 달러 발권을 공유한 것이다. 세계 경제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미국은 자국 화폐인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강요’해왔다. 그러나 이제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하기 위해 그 발권 권한을 세계 각국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바꿔가고 있는 것이다. 보호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윈-윈 방식의 공유주의’가 경제 관계에서 다자주의의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 들어온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11월6일 “오바마 정부가 보호무역주의로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알려진 그는 오바마와도 친분이 깊어 정책 조언을 하는 관계이다. 오바마가 다자주의를 추구하면 그 결과로서 국제 정치는 다극 구조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국 유일의 패권적 질서가 유럽연합·중국·러시아 그리고 중남미연합·아프리카연합 등 지역연합기구들이 중층적으로 다극화하는 힘의 결합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이들 다극 국가들이 미국과 협력적으로 국제 질서를 운영하느냐 거칠게 대결하는 방식으로 나올 것이냐의 문제는 별개이다. 특히 개별 국가로서는 미미하지만 지역 연합체를 구성해 다극 구조의 한 축으로 올라서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남미연합·동남아연합·아프리카연합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남미는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지역 맹주를 노리며 역내 통합을 주도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좌파 정권을 이끌며 부시의 미국에 대항해왔다. 이 지역 국가들이 남미국가연합을 추진하고 중국과의 호감도를 급격히 높이고 있는 데 반해, 반미 좌파 정부가 득세해 미국의 영향력이 저하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바마의 과제이다. 오바마는 상호 이해와 국가 주권의 존중에 기초한 새로운 ‘미주 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을 이 지역에 전한 바 있다. 차베스 등 좌파 정부들과도 공존하겠다고 선언했다. 턱밑의 독침 격인 쿠바에 대해 민주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관계 정상화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있다.

동남아 국가연합이 주목되는 것은 오바마가 이 지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성장 이력과 맞물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지역 연합은 유럽연합 다음으로 역내 통합력을 강화하고 있고 경제 성장 잠재력이 커서 국제 관계에서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정부 때는 중국 포위의 축으로 지정학적 역할이 주목되었던 이 지역이 오바마 시대에 어떻게 재편될지도 관심사이다.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이야말로 오바마의 이상주의·다자주의 정책이 가장 첨예하게 시험을 치를 곳이다.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이라크를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오바마는 핵무장을 추구하는 이란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장기간 매달리게 된다면 그의 다자주의·이상주의 외교는 다극점에 올라선 새로운 강국들에게 허점을 노출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외교 정책 전문가인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오바마 시대에 다자주의가 펼쳐지는 국면에 우리 대외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한시바삐 다자 외교 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한류 벨트인 동남아·아프리카·중동·중앙아시아·동유럽권을 묶는 한국형 다자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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