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천이 되어준 가족의 힘
  • 김지혜 (karam1117@sisapress.com)
  • 승인 2009.05.19 18:3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모의 헌신이 큰 버팀목 구실…아버지와 약속 지키려 투병 중에도 교과서 작업 매달려

▲ ⓒ시사저널 임준선

신기한 일이었다. 지난 5월13일, 서강대 이냐시오관에서 가족과 지인 6백여 명이 참석한 장례 미사가 끝나고, 흰 국화에 덮인 고 장영희 교수의 관이 밖으로 나오자 며칠간 비 오고 흐렸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하게 개었다.

장교수의 지인들은 “평소에도 밝고 낙천적이더니 떠나는 순간에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은가 보다”라며 애틋해했다. 가족들의 기억도 같았다. 둘째 여동생 장영림씨는 “언니의 인생은 신파극이 아니었다. 억척스럽고 독하게 소아마비나 암을 극복해온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면서 힘든 고비를 넘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고 장영희 교수의 삶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장교수의 소아마비 장애와 투병 생활이 힘겨워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보다 밝고 낙천적이고 행복했다. 장교수 스스로 누군가의 희망이 되겠다고 작정한 적도 없다. 내면에서 넘치는 희망의 에너지가 그녀의 에세이를 통해 저절로 전파된 것뿐이다.

어린 시절 장영희 교수가 품었던 희망의 원천은 1994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고 장왕록 교수였다. 아버지는 그녀가 이 땅에 독립적인 인격체로 발붙이고 살 길은 공부뿐이라는 현실을 깨우쳐주었다. 장교수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장애인은 시험 볼 기회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려면 장애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가야 한다며 입학할 수 있는 학교들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니셨다. 신체 장애로 인해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는 것조차 거부당했을 때는, 일일이 학교를 찾아가 사정하며 시험을 볼 기회를 만들어주셨다”라고 전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장애를 딛고 영문학과 교수로서, 비장애인보다 더 빛나게 살도록 희망의 씨앗을 뿌려놓고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바로 다음해인 1995년, 서강대 조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장영희 교수는 5월13일 화창한 오후에 자신에게 정신적·학문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버지의 무덤 바로 옆에 안치되었다. 아버지이자 희망의 씨앗을 주고 먼저 간, 인생과 학문의 선배 곁에 나란히 눕게 된 것이다.

장교수에게 아버지를 넘어서는 좀더 큰 희망의 원천은 어머니였다. 세상은 영문학자인 고 장왕록 교수의 명성 때문에 장영희 교수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주로 조명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꿋꿋함과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지인들은 딸을 지키느라 속으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꿋꿋했던 여장부 어머니와 쓰러지면서도 기어이 학교 강단에 섰던 장교수의 모습이 닮았다고 회상했다.

▲ 지난 5월13일 서강대 성이냐시오 성당에서 열린 장례 미사에 참석한 고 장영희 교수의 가족들. 왼쪽은 운구 장면.

강인한 정신력,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그래서 장영희 교수의 책에는 유독 어머니 이야기가 많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딸을 업어 등교시키고, 두 시간마다 한 번씩 화장실에 데려다주기 위해 학교에 들르고, 장교수를 데리고 10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종로의 침술원에 다닌 강한 어머니. 그녀는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생전에 썼던 신문 기고에서 이런 자신의 어머니를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도 장애인이 죄인이었던 세상에, 장애를 가진 딸이 발붙이고 살아갈 땅을 마련해주기 위해 투쟁의 전사로 살았다’라고 묘사했다. 장교수와 17년간 친구로 지낸 류해욱 신부는 “장영희 교수에게 어머니는 희망의 근원이었다. 늘 자신의 어머니가 강한 분이라고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할 분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도 남달라서 좋은 음식점이나 꽃을 보면 항상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꼭 그렇게 했다”라고 말했다. 장교수는 투병 중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사흘에 걸쳐 노트북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엄마 미안해,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다행히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열흘 가까이 되는 시간을 연남동 어머니의 집에서 보냈다. 의식은 거의 없었지만 형제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어머니와 같이 있도록 배려했다. 여든셋의 어머니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딸의 손발을 주무르며 기도했고 결국, 장교수는 마지막으로 ‘엄마’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분신과 같았던 형제·자매들도 장교수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세 여동생은 척추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병원에 입원했던 3월부터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첫째 여동생 장영주씨는 “언니의 병간호를 하는 동안 고생이라고 느껴지기는커녕, 힘들어도 자매 넷이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말했다. 지인들은 “장교수가 동생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동생들이 언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영희 교수는 생전에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에세이집 <내 생에 단 한 번>에서는 ‘불패의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숭고하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그 싸움은 너무나 비장하고 슬프다’라고 썼다. 하지만 가족들이 기억하는 장교수는 슬프지 않았다. 희망이 있어서 항상 밝았고, 긍정적이었고, 호기심이 넘쳤으며, 사랑하는 가족들 속에서 넘치도록 행복했다는 것이다.

장교수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파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밝고 긍정적이었던 그녀의 삶 자체가 힘든 사람들에게 저절로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원천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분신과도 같았던 가족들이다. 그녀가 남기고 간 희망의 울림은 가족을 비롯한 그를 아는 이들, 그리고 그가 남긴 책을 통해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