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총통에 종신형 내린 마잉주의 ‘카드’ 통할까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09.09.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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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위기 넘기려 재판에 개입한 의혹…‘사면’ 놓고 거래 가능성

▲ 천수이볜 전 타이완 총통이 구치소로 가기 위해 경찰차 앞에 서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 태풍 모라꼿에 강타당한 타이완이 이번에는 정치 폭풍에 휘말렸다. 타이완 1심 법원은 9월11일 전 총통 천수이볜(陳水扁) 부부에게 뇌물 수수 및 공금 횡령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총통을 역임한 민진당 소속 천수이볜은 타이완 민주화와 독립을 필생의 과제로 추구했고 그 때문에 인기도 얻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종신형은 전례도 없거니와 가혹했다는 여론이 높다. 그가 국민당을 상대로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정치 기반은 일단 치명타를 입었다. 이들 부부에게는 총 1천5백만 달러의 추징금도 부과되었다. 이 사건은 법에 따라 피고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고등법원에 항소하게 되어 있으나 현재로서 형량이 변경될 전망은 없다.

천수이볜은 1980년 중반 민진당을 창당해 국민당의 장기 집권과 반민주적 조치들을 종식한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적 이단아이다. 50년 가까이 계속된 계엄령을 해제하고 1996년부터 첫 양당제 선거 제도를 도입했다. 민주주의와 독립의 화신으로 한때 치솟는 인기도 누렸다. 1949년 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으로 도주한 국민당은 너무 오랜 집권으로 부패의 늪에 빠졌다. 국민들은 부패를 청산하겠다는 그의 공약에 표를 던졌다. 그의 개혁 정치는 국민에게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제공했다. 그 결과 국민당 지지자와 민진당 세력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 ‘분열의 정치인’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그러나 스스로 부패의 덫에 빠지는 자충수를 두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대통령 특별자금 3백15만 달러를 횡령하고, 토지 거래를 둘러싸고 9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야망은 크고 개혁 열정은 불탔으나 과격과 과속이 발목을 잡았다. 

수백 명의 지지자들은 민진당 당 컬러인 푸른 셔츠를 입고 법원 앞에 나타나 ‘정치 재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이번 재판을 ‘위헌·불법·무효’라고 규정하고 법관들이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며 그를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일부 과격 시위자들은 이 재판이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사주에 의한 마녀 사냥이라고 주장했다. 동정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립 타이완 대학의 교수이며 국민당 지지자인 린후왕 교수는, 이번 재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모범 재판이라고 말했다.

타이완 역사상 초유의 이 재판으로 인한 후폭풍은 거세다. 일부에서는 마잉주 총통이 직면한 정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마 총통이 배후에서 재판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의 대변인은 이를 부인했으나 천수이볜이 9개월의 옥중 생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이것이 마 총통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많은 사람은 믿고 있다.

태풍 ‘모라꼿’ 피해·본토와의 유화 정책으로 수세에 몰려

▲ 마잉주 타이완 총통은 태풍 대비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국민의 원성을 샀다. ⓒ연합뉴스

마 총통은 7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태풍의 여파로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게다가 본토에 대한 그의 지나친 화해 정책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일부 비판자들은 마 총통이 중국 지도자들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당면한 정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정국 돌파 수단으로 전임 총통에 중형을 내리게 했다고 비난했다.
천수이볜의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유죄가 선고되었다. 여론은 양분되었다. 재판 과정과 절차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민진당은 물론 중립적 분석가들마저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집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구치소로 끌려갔다. 당시 수갑이 채워진 손을 머리에 얹은 그의 구속 집행 장면은 대중에 공개되었다. 이를 본 일부 시민들은 인격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한동안 변호인을 제외하고는 가족, 증인들과의 면회도 금지되었다. 그에게 잠시 보석을 허가했던 3인 합의재판부는 이유 없이 다른 판사들로 대체되었다. 새 재판부는 즉각 천수이볜을 재수감했다. 현 타이완 형법은 1930년대 나치 법률을 모방해 만들었기 때문에 민주주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형법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느냐는 조롱도 나온다.

전 총통을 종신형으로 몰아간 이면에는 국민당과 민진당 사이의 오랜 정치적 암투가 깔려 있다. 타이완을 반백 년 동안 통치한 국민당은 고질적 부패와 정경유착으로 민진당에 권력을 빼앗겼다가 지난해 대선에서 마 총통을 통해 재집권을 하는 데 성공했다. 민진당 정권은 부패 척결로 민심을 얻었으나 무리한 독립 추구 과정에서 본토와 군사적 긴장을 조성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부패 청산을 공약한 지도자가 부패 혐의로 종신형을 받자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다. 마 총통은 지난해 5월 총통 선거에서 ‘준비된 총통’이라는 구호로 인기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는 한동안 순항했으나 태풍 대비에 소홀한 무능 정권으로 원성을 샀고, 그  때문에 총리까지 사임했다. 

 전임 총통을 종신형에 처하면서 시도한 마 총통의 정면 돌파 카드가 약효가 있을지는 현재로서 미지수이다. 당장 2012년 총선이 문제이다. 정치 보복 파문으로 흔들리는 국민당 지지가 3년 후까지 지속될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연말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권에 대한 지지율이 급속히 하락하는 점에 비추어 마 총통이 대가를 치를 것이 확실하다.

물론 마 총통이 실정만 거듭한 것은 아니다. 상당한 정치적 자산을 축적했다. 본토와의 화해 정책 및 취임 초의 외교 업적으로 신뢰를 얻었다. 본토와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순조로워 10월 중에는 타결이 예상되고 있다. 그의 재임 중 외국인 직접투자는 89억 달러가 늘어나 26만명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심지어 양안 무역이 잘되면 통일의 지름길이 열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이 모든 업적이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았다. 정치 게임은 이제 시작 단계이다. 마 총통의 지지율은 35%로 추락했다. 타이완 원주민과 소수 민족을 대변하는 민진당의 분노는 끓어오르고 있다. 관심의 초점은 국민당이 성난 민심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이다. 마 총통은 재판 개입 주장을 일축하면서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으나 공허하게 들렸다. 

마 총통이 최고법원 재판이 있은 후 정치적 거래를 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1974년 닉슨을 기소 전에 사면했으나 타이완 법률은 재판 후에 사면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정치 분석가들은 천수이볜이 일부 혐의를 시인하는 조건으로 그를 사면하는 거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변호인은 그러나 정치적 거래 가능성을 부인했다. 사면 여부는 향후 여론 추이에 좌우될 듯하다. 현재 마 총통에 대한 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만큼 그가 국면 전환을 위해 사면 거래를 먼저 제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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