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통운’발 수백억 비자금 누구에게 배달되었을까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11.2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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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욱 전 사장, 횡령·자금 세탁 등 혐의 드러나…‘전언회’ 고문·‘백소회’ 회원으로 구축한 정·관계 인맥에 ‘눈길’

▲ 곽영욱 대한통운 전 사장은 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 ‘전언회’ 고문을 맡으면서 많은 정·관계 인사와 접촉했다. ⓒ연합뉴스


지난 2000년 6월7일 대한통운 자금팀은 전국 지점·지사에 비밀 e메일 한 통을 보냈다. 제목은 ‘영수증 요청’. 내용은 간략했으나 급박했고, 또 완곡했다. ‘영수증이 급히 필요하니 간이, 카드, 금전 등록기, 백화점(영수증) 등 이유를 불문하고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여 6월9일까지 도착될 수 있도록 보내라’라는 것이었다.

‘지점은 5백매 이상, 지사는 8백매 이상’ 의무적으로 할당했다. ‘전 직원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하니 매수 및 도착일자를 엄수하여 송부하라’라며 독촉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통운 자금팀은 무슨 이유로 엄청난 양의 영수증이 필요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대한통운은 옛 동아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는데, 바로 이틀 전에 동아그룹의 법정관리인인 고병우 회장의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4·13 총선 당시 현역 의원 등에게 10억원대의 정치 자금을 뿌린 것이다.

고회장은 로비 대상자 1백68명을 선정한 뒤 동아건설 사장과 고문, 대한통운 사장에게 10~50명씩 할당해 로비 자금을 살포했다. 이때 대한통운 사장이 바로 곽영욱씨였다. 이 영수증은 비자금을 합법적인 돈으로 위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곽사장은 비자금 사건이 터진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고회장이 비자금을 만들어서 달라고 했으나 거부했다”라며 동아그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독자 생존을 모색한 것이다.

이때부터 사실상 곽사장은 대한통운의 회장 역할을 했다. 당시 대한통운 최대 주주는 종업원들이 소유한 ‘우리 사주’였기 때문에 최고경영자는 곧 오너 회장이나 다름없었다.

2000년 11월, 대한통운이 동아건설 지급보증 문제로 흑자 부도가 나자 곽사장은 법정관리인 사장으로 선임되었고, 2005년에 퇴임할 때까지 6년여 동안 사장 자리에 있었다. 재임 기간 동안 곽사장은 겉으로는 ‘투명 경영’을 외쳤다. ‘직원과 고객의 영혼까지 사로잡겠다’라며 ‘영혼 경영’까지 내걸었다. 회사 곳곳에는 자신의 어록을 게시하도록 했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는 곽사장을 4년 연속 우수 관리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며 곽사장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곽사장은 두 얼굴의 경영인이었다. 회사가 부도난 후 주식은 감자되어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고, 많은 임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직원들의 월급은 동결되었고, 임원들의 월급은 3분의 1로 삭감되었다. 임직원들 모두 고통을 감내하며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그런데도 곽사장은 뒤에서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만들었고, 이 중 80여 억원을 개인 주머니에 챙겼다.

대한통운 비자금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권오성 부장검사)에 따르면 곽사장은 법정관리가 시작된 2000년 말부터 2005년 6월까지 기밀비 명목으로 각 지사를 통해 비자금을 만들었다. 부산지사(1백55억원), 인천지사(18억원), 포항지사(6억원), 청주지사(14억원), 서울지사(12억원) 등에서 돈을 받아냈다.

돈을 건네받은 장소도 한 곳을 특정하지 않고, 각 지사장을 본사 사장실, 커피숍, 호텔, 골프장 등으로 불러서 돈을 받았다. 곽 전 사장은 개인 용도로 사용한 80여 억원 중 40여 억원을 주식 투자에 쓴 것으로 밝혀졌다. 곽 전 사장에게 가장 많은 돈을 준 부산지사는 현 이국동 사장(구속)이 지사장으로 재직하던 곳이었다. 

곽 전 사장은 이렇게 받은 돈을 여러 번에 걸쳐 세탁하며 추적이 불가능하게 했다. 여기에는 비서실 여직원이 동원되었다. 가령 10만원권 수표를 100만원 이상의 고액 수표로 바꾸었다. 일부는 직원이나 직원 가족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관리했다.

‘뒷돈’ 받은 인사들 줄줄이 드러날 듯

▲ ‘대한통운 비자금’이 지난 정권 유력 인사에게 전달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오른쪽 사진은 금호그룹에 인수되기 전 모습이다. ⓒ시사저널 박은숙

그렇다면 곽 전 사장은 비자금을 어디에 사용했을까. 비자금의 사용처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영업 기밀비에 들어간 경우이다. 거래 업체와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업무와 관련한 청탁과 로비를 펼치는 자금으로 들어갔을 수 있다.

곽 전 사장에 앞서 회사 자금 2백29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된 이국동 사장도 해운업체 회장 등에게 거액의 뒷돈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물류업계에서는 대형 계약이 성사될 경우 매출액의 3~5% 정도를 리베이트로 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되어 있다.

또 하나는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 자금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곽 전 사장은 검찰에서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인 ㄱ·ㅈ·ㅎ 씨에게 돈을 주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자금의 일부는 기자들에게도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곽사장은 재임 중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경영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언론 인터뷰 등이 끝나면 봉투에 빳빳한 새 지폐로 100만원을 넣어 촌지로 주었다. 실제 곽 전 사장은 기자 본인에게도 돈 봉투를 내밀었으나 거절한 적이 있다.

이렇듯 곽 전 사장은 비자금을 거래 업체, 정·관계 인사, 언론인들에게 살포하며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거나 홍보 나팔수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의 인맥은 학연이나 지연을 통해 만들어졌다. 곽 전 사장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나왔다. 때문에 양대 인맥은 자연스럽게 전주고를 주축으로 한 호남 인맥과 충청권 인사들이었다. 실제 곽 전 사장은 최근까지 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인 ‘전언회’의 고문을 맡았었다. 언론인 출신은 아니지만 ‘고문’ 직함으로 회원들과 교류했다. 곽 전 사장이 돈봉투를 건넸다고 진술한 ㄱ·ㅈ 씨도 전언회의 회원이다. 물론 해당 인사들은 금품 수수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곽 전 사장은 전언회를 통해 정·관계 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언회는 전주고 동문 출신들의 모임이지만, 국내 언론인 모임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회원으로는 전·현직 언론사 사장을 비롯해 현직 언론인 등이 다수 포진해 있다. 한 전언회 회원은 “곽고문이 재정적인 지원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곽 전 사장은 또 충청권 명사들의 모임인 ‘백소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백소회에는 충청권 유력 인사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곽 전 사장은 백소회 모임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곽 전 사장의 비자금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곧 이른바 ‘곽영욱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을 소환해 조사할 것으로 보여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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