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정착’하는 탈북자들의 삶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2.2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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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주의 아닌 새로운 시선에서 영화화…해외 영화제 진출도

 굳게 닫혔던 북한의 속내를 드러나게 한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붕괴 때문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토로 탈주한 북한인을 통해 북한 내부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적지 않은 수의 탈북자들이 중국과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이런 현상은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문화 영역에서도 이들의 삶을 수렴한 영상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3월에 개봉하는 <두만강>은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대에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최악의 기근을 몸으로 겪고 있는 북한 민초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달 개봉하는 <굿바이 평양>은 재일동포의 시선으로 바라본 북한 사회를 담고 있고, 4월에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를 다룬 <무산일기>, 5~6월 중에는 여성 탈북자의 삶을 다룬 <댄스 타운>이 개봉한다. 지난해 상업영화 <의형제>나 <황해>가 탈북자 문제를 주요 소재로 활용했을 만큼 우리 사회에서 ‘탈북자’라는 소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다만 이를 소재주의가 아닌 탈북자나 재중동포의 시선에서 영화화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실제로 <황해> 같은 영화에 대해서는 연변 커뮤니티 사이트에 조선족을 영화 속에서 ‘야만’이나 ‘악’으로 활용해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과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 점에서 <두만강>은 자유롭다. 이 영화에서는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온 북한 난민은 그 자체로 연민의 대상이지만 동포의 연민에 기대 허기를 면한 뒤 더 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얼굴을 바꾸는 ‘보편적인 인간’일 뿐이다. 장률 감독의 카메라는 이런 삶의 극한적인 바닥에서도 이중적인 이기심을 잃지 않는 인간의 얼굴을 담담히 담는다. 

▲ ⓒ인디스토리 제공

“감독의 경험과 영화의 주제·소재가 밀착”

 아이러니한 점은 1세기를 두고 반복되는 북간도의 비극이다. 소설가 안수길씨는 1960년대에 펴낸 <북간도>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하층 농민의 간도행에 대해 ‘메마른 땅에 앉아 굶어 죽으나 압록강을 건너 농사를 짓다가 붙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당시 강을 건너 북쪽으로 떠난 이주 노동자에 대해 묘사했다. 근 100년이 흐른 지금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는 도강파가 다시 등장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같다. 다만 강을 건너다가 총살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100년 전보다 더욱 가혹해졌다.

 영화가 이런 민족사적인 비극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최근 탈북자나 이주 노동자 소재 영화가 늘어나는 데에 대해 “독립영화에서는 주류에서 소외된 삶을 많이 다룬다. 다만 <두만강>이나 <무산일기> <굿바이 평양> 등의 영화는 감독과 영화의 주제나 소재가 밀착된 경험을 통해 나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라고 말했다. <두만강>의 장률 감독은 재중동포로, 탈북자 문제를 바라보는 조선족 내부의 복잡한 시선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또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은 ‘전승철’이라는 탈북자와 실제로 함께 생활하고 이를 단편영화로 풀었다가 다시 장편영화로 만들면서 주연 배우도 겸한 경우이다. <굿바이 평양>의 양영희 감독은 재일동포로서 오빠 세 명이 북송된 가족사를 카메라에 담은 경우이다. 때문에 이들은 영화적 쾌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탈북자나 북한 사회를 소재화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장률의 이런 방식은 전작인 <망종>이 칸 영화제에, <경계>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그를 일약 세계적인 감독 대열에 올려놓았다. <두만강>은 파리 영화제 최고상, 러시아 이스트웨스트 영화제 심사위원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지난 2월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대상을 탔다. ‘탈북자’라는 민족의 슬픔과 치부가 어느덧 한국 영화의 자산으로 편입되고 있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발레극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백조의 자리를 빼앗는 흑조의 역할을 한 명의 발레리나가 연기한다고 한다. 왜 분위기가 딴판인 두 인물을 1인2역으로 하는 것일까? 물론 왕자가 속을 정도로 둘이 닮아야 한다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백조와 흑조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블랙 스완>은 바로 이 점에 착목한다. 백조와 흑조를 같이 연기해야 하는 발레리나를 통해,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강박과 자기 몸과 혹독하게 대결하는 이의 분열된 자의식을 보여준다. 여기에 여성 사이의 살인적인 경쟁, 지긋지긋하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엄마와 우월적 지위에서 유혹하는 남근적 섹슈얼리티 그리고 레즈비언적 욕망 등이 더해진다. 

 물론 이러한 주제는 이미 많은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것이다. <블랙 스완>에서 탁월한 점은 익숙한 주제를 영화라는 장르가 지닌 표현력을 극대화시켜 관객의 오감에 완벽하게 구현시켰다는 데 있다. 영화는 그녀가 전철 유리에 비친 동료를 쫓아가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녀와 동료가 선망하고 의심하는 거울상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상은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되어 보이고, 동료는 그녀의 도플갱어로 보이기도 한다. 키득 거리는 환청, 푸드덕 푸드덕 조금씩 커지는 깃털 소리 등은 긴장과 공포를 고조시키며, 관객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끝까지 알기 어렵다.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레옹>의 마틸다에 고착된 이미지를 벗지 못했던 그녀의 고민은 백조의 이미지에 갇혀 변신을 갈망하던 주인공의 한계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대에서 완전히 흑조로 변신했듯이, 나탈리 포트만 역시 <블랙 스완>을 통해 백조이자 흑조인, ‘팔색조’로 변신했다. 과연, 그녀는 ‘퍼펙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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