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에 운명 걸린 ‘사면초가’ 이탈리아
  • 조명진│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1.11.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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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루스코니 총리 책임론 대두…드라기 ECB 총재에 ‘구원’ 기대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왼쪽). 위는 지난 10월15일 이탈리아 로마 시위 현장에 놓인 ‘실비오에게 신발을 던져라’라고 쓰인 포스터. ⓒAP연합
그리스에서 발원된 유럽 재정 위기의 먹구름은 스페인, 아일랜드, 포르투갈을 덮고 이제 이탈리아에까지 드리우며 그 폭이 확장되고 있다. 즉, 재정 위기에 정치 리더십 부재까지 겹친 설상가상 지경으로 이탈리아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위기의 책임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로 향하고 있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10월29일자의 제목은 ‘누구는 유로를 망치고, 누구는 유로를 구하고(One could doom the euro, another could save it)’였다. 유로화를 위태롭게 만드는 장본인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유로화를 구해야 되는 임무를 띤 이탈리아 중앙은행장 출신의 마리오 드라기 신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가리킨다. 기사 제목은 유로화의 미래가 두 이탈리아 지도자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11월1일부터 ECB 총재직에 오른 드라기는 이탈리아 정부의 재무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소속된 적이 있는 재무통이다.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직을 물러나며 유럽연합(EU) 재정의 핵심 자리인 유럽중앙은행 총재직을 맡게 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와 스페인의 재정 위기로 유럽중앙은행의 자금 상태가 경직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책을 맡게 된 드라기 총재가 독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기에 직면한 회원국들 편에 서서 재정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수렁에 빠졌지만 살아남은 베를루스코니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미 올 8월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투자 심리를 회복하기 위한 이탈리아 정부의 절대적인 조치를 압박하는 공문서를 받은 바 있다. 그리고 9월20일 신용평가 기관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이탈리아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낮추어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들의 신임도는 1년 전 35%에서 24%로 떨어졌다. 급기야 10월14일 이탈리아 의회에서 진행된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대한 신임을 묻는 투표 결과는 찬성 3백16표, 반대 3백1표로 나왔다. 가까스로 총리직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같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끈질긴 정치 생명은 나머지 유로존 국가들에게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10월23일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EU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메르켈 독일 총리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credible)’ 개혁 조치를 내놓으라는 굴욕적인 압박까지 받았다. 올여름 이탈리아 채권 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 유럽중앙은행(ECB)이 이탈리아 채권을 매입해주는 대가로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문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권 시장이 안정될 기미를 보이자,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긴축 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로 인해 독일 정부의 원성을 샀다.

정상회담 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메르켈 총리와 사르코지 대통령이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약속이 재확약할 만한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저하면서 서로를 쳐다보자 기자회견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로 인해서 유럽연합의 창단 회원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굴욕을 겪게 된 순간이었다. 

총리 지지했던 가톨릭 교회·재계도 등 돌려

▲ 마리오 드라기 신임 유럽중앙은행 총재 ⓒAP연합

유럽 재정 위기의 발원지인 그리스의 파판드레우 총리는 여타 회원국 지도자들로부터 분노보다는 동정적인 대우를 받고 있고, 스페인의 자파테로 총리는 늦게나마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도함에 따라서 존경심을 되찾았다. 그런데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조차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형국에 처해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정작 베를루스코니 총리 자신은 이같은 모욕적 취급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지난 15년 집권 기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약속만 했지 지킨 것은 없다는 총체적인 국내 여론에 뭇매를 맞으면서도 총리직을 고수하는 억세게 운 좋은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언론 재벌인 베를루스코니의 처음 이미지는 신선하고 역동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의 언론 사업체의 회계 부정과 관련된 소송은 정치 활동에는 마이너스적 요소이기는 하지만 사기와 탈세가 만연한 이탈리아에서는 정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 여론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가장 큰 실정이 다수 의석을 가진 집권당을 이끌면서도 이탈리아의 경제 개혁을 이루지 못한 무능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총리의 지지 세력이었던 가톨릭 교회와 재계 지도자들조차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현 총리가 미성년 창녀와 매춘했다는 것을 포함해 네 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상태에 있다는 것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는 수치임에 분명하다.

이탈리아가 위기에 처한 마당에 자신의 쾌락과 이권에만 집착하고 대외적으로 당하는 굴욕을 망신으로 여기지 않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리더십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한편 드라기 ECB 총재는, 유로화가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출신 국가인 이탈리아를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구해야 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드라기 총재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희망으로 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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