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 리더’ 시대 오는데 아직도 여성 리더 논란을…
  • 이나미│신경정신과 전문의 ()
  • 승인 2012.02.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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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와 사회 진출이 힘든 이유와 배경

ⓒ honeypapa@naver.com

다 아는 얘기이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남녀평등과 현실은 많이 다르다. 특히 리더십 문제에서 여성과 남성이 같은 위치와 조건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부장제가 걷어진 것처럼 보이는 선진국도 그렇다. 2004년 영국에서 정교수의 비율이 남성 87%, 여성 13%인 데 비해 강사의 비율은 남성 65.4%, 여성은 34.6%였다. 2001년 한국 여교수의 비율은 14.1%이고, 시간 강사의 비율은 32%였다. 여교수를 40% 이내로 뽑는 여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10% 미만으로 여교수를 뽑는다는 얘기이다. 여성들은 학계에서도 정규직보다 임시직에 종사한다. 미국은 2016년에 여성 CEO 비율이 6%에 그칠 것이라고 한다. 영국 역시 100대 기업의 집행 이사 중 여성은 3%이다.

3당의 대표가 모두 여성인 한국의 2012년, 여성 정치인의 비율은 여전히 낮다. 총선 후보로 등록한 여성 후보의 비율은 10%도 되지 않는데, 여성 할당제와 가산점 때문에 그마저 남성 후보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할당제가 여성계와 당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여성 화장실도 없는 국회에서 남장을 하고 남자처럼 행동해야 했던 국회의원 김옥선씨의 시대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할 수도 있다. 서양에서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이 겨우 20세기 초반이었다. 

가부장적인 전통에 성과 중심주의까지 거들어

어쨌거나, 여성이 리더로 성장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가. 몇 가지 설명은 가능하다. 우선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다. 아이가 아프거나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을 때 걱정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강심장을 가진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집안 살림을 해주는 아내가 있는 남편들이 마치 독립운동가처럼 직장에 집중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물론 그런 뒷받침을 해 주는 현모양처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안팎으로 에너지가 분산되는 여성들과,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남성의 경쟁력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고용주의 말에 단순하게 반박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길게 보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정을 배려하지 않고 회사와 조직만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건강하게 지속될지는 의심스럽다. 학교 폭력, 물신 숭배, 외모 지상주의 등 우리 사회에 켜지는 이런저런 빨간불이 어쩌면 집과 일터가 서로 소외된 채 성과 중심주의에 몰두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가부장적인 전통에서 주로 남을 돌보고 배려하는 것에 길들여진 여성적인 특성이, 경쟁해야 생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리더십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정계·재계·학계를 막론하고 정치적 감각과 공격적 추진력이 필요한데, 여성에게는 그런 특징이 부족하다고도 한다. 군대 등의 조직에서 쓴맛, 매운맛을 겪어 보았던 남성의 형님 문화에 여성이 낄 자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여전히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는 접대 문화나 조직폭력배를 연상케 하는 끈끈한 선후배 관계는 여성 문화와는 조금 다르다. 조직이나 이른바 주군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보이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좀 더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한다.

여성은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데다가 사적인 관계에 얽매여서 이성적으로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고도 말한다. 남자 직원을 꾸중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마는데, 여성 부하를 꾸중하면 울기부터 해서 난감하다는 관리자도 적지 않다. 행동으로 옮기는 남성들에 비해 말부터 앞서는 여성들이 설화나 필화 소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여성이 공감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해 휘둘리는 면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합의와 타협만 하다 리스크 관리와 타이밍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또 남성들은 자신의 카리스마도 조직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 반면,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 때문이라고 믿어서 조직에 대한 충성도와 밀착력이 약하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공한 여성들을 보면, 오히려 남성보다 더 합리적이고 추진력이 있으며 공격적이다.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남성성, 즉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발동하면 남성들보다 더 권력 지향적이고, 더 잔인하고, 더 냉혹하고, 더 아집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중국의 3대 악녀로 꼽히는 전한의 여태후,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는 감상이나 인정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 논리에 따라 잔인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남성보다 더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모택동의 처 강청, 영국의 대처, 독일의 메르켈 등의 여걸도 남성보다 더 냉정하고 추진력이 있었다. 평범한 여성들도 리더의 자리에 올라가면 모습이 달라진다. 부녀회장, 동창회장, 계주, 동장, 학부모 회장, 하다못해 시어머니의 자리에 오르면 조직 내 권력 다툼, 세몰이, 흑색선전, 잘난 척 등의 뿌리가 되는 파워 콤플렉스에 사로잡힐 수 있다. 문제는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개인의 성정이 리더로서 얼마나 성숙한 것이냐’이다.

현대 사회는 수용적·관계 지향적·공감적인 리더십 요구

봉건 시대에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구별되었고, 사람의 운명도 뒤집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현대의 민주 사회에서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능력과 기회만 있다면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는 있다. 그럼에도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최근 많은 사람이 비분강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남편 잘 만나서 신분 상승하는 것 이외에는 최근까지 ‘용’이 되려고 상상하는 여성조차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설령 그런 여성들이 있다 해도 팔자가 세다고 오히려 경원시 당하기도 했다. 19세기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랑의 형이상학>이라는 책에서 ‘세상에는 집안 살림에 충실한 여성, 혹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만이 존재해야 한다’라고 쓴 바 있다. 공자도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서 ‘여자와 소인은 양성하기 힘들다(女子與小人難養)’라고 단언했다. 물론 공자와 쇼펜하우어는 모두 여성과의 관계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지금 그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남성이 있다면 아마도 어떤 사회이건 리더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요즘에는 남성들조차 강력하고 지혜로우면 여성 리더를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어떤 이들은 과거 남성이 수렵과 목축에 종사했고, 여성은 대개 집을 지키면서 요리를 하고 아이를 양육해왔기 때문에 여성은 수동적이고 남성은 능동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니터만 보고서도 수억 원을 벌 수 있는 현대에, 들판을 떠돌면서 짐승을 잡아 오는 마초적 리더십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용적이고, 관계 지향적이고, 공감적인 리더십이 새로운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미래 세계에서는 딱히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과 남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양성적인(Androgynus) 리더를 요구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리더는 따뜻한 가슴과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몸, 명철한 머리와 판단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리더가 바지를 입었건, 치마를 입었건, 휠체어를 탔건, 의수와 의족을 했건, 피부 색깔이 검고 희건, 가방끈이 짧건 길건, 동성애자이건 이성애자이건 그런 것이 리더십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성, 장애인, 이민자, 낮은 학력의 사람 같은 소수자들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리더가 될 수 있어야 진짜 평등하고 신나는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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