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설치 스스로 하는 ‘나만의 제품’에 빠지다
  • 김보미│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
  • 승인 2012.05.1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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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에게 실용·감성적 가치 충족시켜주는 DIY 상품 인기

한샘이 운영하는 플래그십스토어의 ‘서재·자녀방 셀프디자인존’. ⓒ 한샘

지갑 열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사고 싶은 것이 생겨도 가격을 보면 선뜻 값을 치르기가 겁이 난다. 어디서 만들어져 어떻게 온 물건인지도 미덥지 못하다. 그래서 소비자들이 택한 방법은 ‘DIY’(Do-It-Yourself;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가격과 품질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셈이다. 내 손을 거친 나만의 맞춤 상품은 절대적인 값어치를 떠나 만족도도 높다. 조금 모자라도 더 정감이 가게 마련이다.

이같은 소비 성향은 젊은 층이 주도한다. 지난해 LG경제연구원이 조사한 ‘한국인 라이프스타일’을 보면 20~30대 중 20%가 “간단한 소품·가구는 만들어서 사용한다”라고 했다. 10~30대의 10명 중 세 명 가까이(26%)는 “완제품을 사 디자인·성능을 취향에 따라 바꿔 쓴다”라고도 한다.

싼 가격도 이유…가구 분야에서 수요 늘어

전문가들은 기성품 대신 DIY 제품을 사용할 때 소비자들이 느끼는 실용·감성적 가치는 훨씬 크다고 분석한다. 제품에 대한 신뢰가 있고 과정의 보람이 추가된 덕이다. 오직 나에게 맞춰진 물건이라는 데서 생겨나는 만족감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값이 저렴하다. 싼 가격을 감안해 제품에 추가적으로 들여야 하는 노동 등의 부담 정도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DIY 소비 추세가 두드러진 분야는 가구이다. 우리나라 가구 소비자들은 보통 소파·탁자·수납장, 침대·책상 등 세트 구매가 많았다. 물론 제품 브랜드는 한 곳으로 통일되었다. 신혼집이나 혼자 쓸 아이 방을 새로 꾸미는 시점에 업체별 예시를 보고 선택하는 식이다.

이제 ‘획일적’ 꾸밈은 지루해졌다. 2013년으로 예고된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의 국내 진출은 경향성을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케아는 고객이 스스로 조립·설치하는 가구를 만든다. 밝은 색깔에 독특한 구조 등 디자인을 강조했다. 고객이 수고를 더 하도록 하고 값을 낮춘 것이 강점이다. 국내에 확산되기 시작한 DIY 바람과 맞아떨어진다.

국내 업체들도 움직이고 있다. 한샘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플래그십스토어 잠실점에 ‘서재·자녀방 셀프디자인존’을 만들었다. 매장에 줄자와 연필, 설계 도면이 마련되어 있다. 집에서 재온 방, 기존 가구 등의 크기를 고려해 배치도를 직접 그려 주문할 수 있다. 매장에는 가구와 생활용품이 종류별로 쭉 늘어놓는 방식으로 진열되어 있는데, 이는 고객이 특정 예시 없이 영감을 얻어 알아서 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샘 관계자는 “아이의 학습·수면 습관이나 가족들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는 소비자가 직접 공간을 짜고 싶어 하는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전문상담사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구매 확정 시간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라고 말했다.

새로 바꾸지 못하면 뜯어서 다시 고쳐 쓴다. 벽지 대신 시트지를 사 덧붙이거나 가구·가전제품도 시트지를 이용해 색을 바꾼다. 벽지 위에 바를 수 있는 페인트도 나와 있다. 옥션에서 4월 한 달간 팔린 인테리어 관련 DIY 용품 판매량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가 늘어났다. 1위는 단연 시트지이다. 간단한 공사에 쓰이는 투명 트레이·롤러·장갑·토시 등으로 1만원대 세트를 만든 상품들도 인기이다. KCC는 희석하지 않아도 바로 바를 수 있고 페인트 냄새를 줄인 가정용 페인트 신제품을 올 들어 연이어 출시하고 있다. 이들은 2ℓ씩 소포장되어 부분 도장하기에 부담 없는 용량으로 담았다.

품을 들여 만드는 일은 간식 등 먹거리에도 확산되는 추세이다. 식비 부담과 먹거리 안전에 대한 불신 탓이다. 덕분에 3~4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간식 프리믹스는 엄청난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2010년 3백70억원 규모였던 시장은 지난해 4백억원, 올해는 4백50억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밀가루·설탕·버터·전분 등 재료를 분말 형태로 만들어놓은 이 제품은 도구 없이 요리가 가능하다. 값도 싸다. 판매량이 가장 많은 호떡믹스는 10개분, 550g짜리가 3천9백원 정도이다. 개당 3백90원꼴이다. 요즘은 간단한 호떡·쿠키 제품에서 오꼬노미야끼 등 전문점 음식도 믹스로 나온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2007년 호떡 한 종류였던 프리믹스는 지난해 브라우니, 스콘, 카스테라 등으로 다양해졌다. 기술이 없어도 직접 만들 수 있고 완제품보다 값이 싸 아이를 둔 주부들이 가장 많이 구입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빵 등을 직접 만들 수 있는 도구도 잘 팔린다. 지마켓의 1~4월 홈베이킹 식재료와 도구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백66%, 38%씩 증가했다. 과거 추억용으로 등장하던 재봉틀 소비도 최근 들어 늘어났다. 바지단을 줄이거나 짧은 박음질에 쓰이는 휴대용 ‘손미싱기’ 등은 1만원대에도 살 수 있다. 2천~3천원씩 드는 단 줄이기를 몇 번 하면 뽑을 수 있는 단가이다.

선택 폭 늘리자 잠재 소비자 모여들어

분말 형태로 출시된 전문점 음식의 재료 제품들. ⓒ 백설
완제품 소비 대신 직접 만드는 소비자가 많아지면 제조사에는 위기가 올까. 그렇지 않다.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기업들에게 원재료나 장비 등을 팔아온 B2B 기업에게는 소비재 시장에 새로 발을 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부품을 사러 소비자가 직접 오기 때문이다.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는 오토바이 브랜드 할리데이비슨은 제품을 주문할 때 선택해야 하는 부품이나 액세서리 등이 잘 구성되어 있다. 개성이 강한 고객의 개별 취향에 모든 제품 설계를 맡기는 셈이다. 탠디·세라 등 국내 구두 브랜드도 이같은 소비 성향에 맞춰 주문을 받는다. 가죽 색깔·무늬와 굽 높이, 뒷굽 색깔, 앞코에 덧댄 부분(가보시)의 높이, 앞·뒤 트임 여부 등을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준다.

자동차 부품업체들은 오픈마켓 등을 통해 소비자와의 직접 거래를 늘리고 있다. 어두운 밤에 차를 빛나게 꾸밀 수 있는 LED 조명 등 주로 차를 장식하는 품목이 주를 이룬다. 모양 변경이 쉽지 않은 차에 개성을 나타내기 위한 ‘튜닝’ 욕구가 커진 것이다. 지마켓에서 팔린 차량용 DIY 부자재는 올 1~4월 전년 동기에 비해 81%가 늘어났다. 지난해 연간으로 보면 2010년 대비 7백%나 급증했다. 최경운 LG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자신의 노동력과 아이디어로 뭔가를 만들어냈을 때의 보람은 현대인이 느끼기 쉽지 않은 성취감을 맛보게 해준다. 스스로 재료·부품을 선택하고 만드는 과정 모두를 통제하는 DIY는 소비자와 제조사 간 정보 비대칭을 없애 제품 신뢰 역시 키우는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인터넷 환경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발달할수록 DIY 확산 속도도 더 빨라질 수 있다. DIY를 위해 투여되는 소비자의 노력에는 시간과 공간, 정보 탐색 등 비금전적 비용이 포함된다. SNS 등은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를 늘려 결국 이 추가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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