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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표창원의 사건 추적] 미군에 희생된 꽃다운 청춘의 절규

엽기적 시신 훼손에 온 나라 경악…SOFA 불평등 일깨워 1992년 10월 동두천 주한 미군 범죄 희생자 윤금이씨 사건

표창원 경찰대 교수 ㅣ | 승인 2012.09.18(Tue) 09: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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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윤금이씨 살해 사건 규탄대회. ⓒ 연합뉴스
‘지옥 문’이 열렸다.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 위치한 김성출씨 집은 인근 미군 부대 주변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쪽방 하나씩을 세 들어 사는 허름한 판잣집이다. 다들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꾸려나가는 처지인지라 작고 큰일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조촐한 동네에 있는 조용하고 평범한 집이었다. 1992년 10월28일 오후 4시30분, 집주인 김성출씨가 만 하루가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는 ‘문간방 아가씨’의 방문을 열기 전까지는 그랬다. 부모 병구완이나 동생들의 학비 마련 등 피치 못할 사연들 때문에 객지에서 미군들에게 술이나 웃음을 팔며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가씨들이 살고 있었다.

살해 후 맥주병 등 시신에 쑤셔넣어

김성출씨는 밖에서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아가씨의 방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악취가 코를 찔렀다. 두 눈에는 바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괴이한 광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 안 집기는 마구 어지럽혀져 있고, 바닥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물체가 하얀색 가루에 뒤덮여 있는데 그 밑에는 검붉은 액체가 군데군데 기분 나쁜 덩어리로 엉긴 채 말라붙어 넓게 깔려 있었다. 생전에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처참한 광경에 갑작스럽게 노출된 김성출씨는 충격에 휩싸인 채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문간방 아가씨’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조금 놀란 가슴이 진정된 김성출씨는 전화기를 향해 뛰어가 112를 누르고는 횡설수설하며 겨우 신고를 마쳤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들 역시 경악했다. 하얀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성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타당해 터지고 붓고 찢어져 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였는데, 바닥에 흥건히 고이고 말라붙은 검붉은 액체는 피가 분명해 보였다. 더 끔찍한 것은, 이미 사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 보이는 고인의 시신이 끔찍하게 유린되고 훼손당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시신의 성기에는 유리 음료수 병이 박혀 있었고, 항문에는 철제 우산대가 깊이 꽂혀 있었다. 나중에 시신 부검 과정에서 시신의 성기 밖으로 삐져나온 음료수 병 안쪽에 맥주병 2개가 더 들어가 있는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져 부검의마저 경악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날 오후 김성출씨가 열었던 것은 ‘지옥 문’이었던 것이다.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한 피해자 윤금이씨. 그녀는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또래 여성들이 꿈꾸는 평범한 행복을 포기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던 가여운 젊은이였다. 시골 농촌 마을에서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과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윤금이씨의 삶은 지독한 가난 끝에 얻은 병환으로 아버지가 사망한 17세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 윤금이씨는 공장을 전전하다, 고생만 하고 돈은 많이 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던 중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유흥업소에 취직하게 된다.

이후 흘러흘러 평택과 안정리 등 미군 부대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새로운 삶을 일구겠다는 결심을 한 뒤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인 1992년 10월 초에 동두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월세 4만원짜리 문간방을 얻은 윤금이씨는 꽃도 팔고 구걸 행위도 하면서 가능하면 술과 웃음과 몸은 팔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고 먹고살기 위해 주말이면 다시 미군 클럽에 나가 미군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양색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고향 마을에서 인심을 잃지 않고 있던 윤금이씨는 사건 발생 16일 전이었던 자신의 생일날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나눠주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쳐본 적이 없고, 단 한 번 평범한 또래 친구들처럼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여유롭게 수다를 떠는 ‘사치’를 누려본 적도 없는 윤금이씨는 1992년 10월28일 새벽,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막 넘긴 그날, 그렇게 안타깝고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망 이틀 후인 10월30일, 시골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달려온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시신은 화장 절차를 거쳐 영면에 들어갔다.

현장 감식을 통해 명백한 살인 사건임을 확인한 의정부경찰서는 가용 경찰력을 총동원해 현장 인근에 대한 수색을 실시했다. 또한, 형사 40명을 급파해 피해자 주변 인물과 현장 인근에 대한 탐문 수사 및 주변 우범자 등 용의 선상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이른바 ‘기지촌’이라 불리는 미군 부대 인근 지역의 특성과 피해자 윤금이씨의 직업을 감안해 미국 범죄수사대 역시 수사관을 파견해 한국 경찰과 공조 수사를 진행했다. 사건 전날 밤 고인의 행적을 탐문하던 의정부경찰서 형사들은 윤금이씨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백인 미군 병사의 부축과 도움을 받아 귀가했고, 귀가하면서 두 사람이 집 근처 가게에 들러 삶은 계란 등을 사먹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해당 미군의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시신을 부검하던 중 자궁 안에서 발견된 맥주병에서는 또렷한 지문이 발견되었고, 이 지문은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의자만 나타난다면 범인인지 여부를 밝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윤금이씨가 일했던 동두천 보산동의 클럽(왼쪽)과 이제는 공원으로 바뀐 윤씨의 전 거주지(오른쪽). ⓒ 시사저널 임준선
한국 경찰이 미군 부대 들어가 조사 진행

사건 발생 3일째인 10월31일, 목격자들의 진술과 제보를 토대로 사건 전날 만취한 윤금이씨와 함께 귀가한 미군 병사가 주한 미군 제2사단 제20보병연대 5대대 본부중대 소속인 케네스 마클(Kenneth Markle·20세) 이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곧바로 케네스 마클을 체포하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피 묻은 셔츠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케네스 마클의 지문은 시신의 자궁 안에서 발견된 맥주병에 찍힌 지문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살해한 사람과 맥주병을 꽂아넣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면, 사건은 해결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검거된 피의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미군 병사’라는 점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하면서 미 군정청의 통치를 받고, 한국전쟁과 이후 분단 상태에서 미군의 주둔을 필요로 했던 우리나라는 미국과 주둔 미군의 법적 지위 및 미군 기지와 시설의 권리 등을 보장해주는 ‘주둔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한국 경찰이 범죄 혐의로 체포한 미군 병사나 군속의 신병을 즉시 미군측에 인도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속이 필요한 경우 그 구금 장소는 ‘미군 시설 내’로 한정하고 있어 이번 사건처럼 한국인 여성을 무참하게 살해한 중대한 흉악 범죄 사건의 피의자임에도 한국 경찰이 구속 수사를 통해 집중적인 조사를 행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미군 헌병대는 의정부경찰서에 피의자 케네스 마클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고, 한국 경찰은 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케네스 마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때마다 한국 경찰은 미군 부대를 방문해 복잡한 출입 절차를 거친 후 제한된 시간 동안, 미군 관계자 입회하에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보도를 접하고 범행의 참혹성에 경악했던 시민들은 용의자를 검거하고도 우리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해 철저히 수사하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늘 외세에 짓밟히며 당하고만 살아온 ‘민족의 한’이 자극받은 것이다. 일부에서는 미군이 용의자 케네스 마클 이병을 본국으로 송환해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11월3일, 동두천 시민들과 사회단체들이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와 미군의 피의자 신병 인도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동두천 시내 택시 운전기사들은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을 공개적으로 펼쳐나갔다. ‘동두천 지역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1월5일에는 총 50여 개 사회단체가 모여 ‘주한 미군의 윤금이씨 살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결성되었다. 공대위는 ‘피의자 케네스 마클 구속 및 엄중한 처벌과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것을 미군 2사단에 제출했다. 이후 동두천 거리에서는 시민들의 규탄대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점차 시위의 물결은 동두천을 넘어 서울과 전국 각지로 번져나갔다. 불공정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1993년 4월 케네스 마클 이병이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무기징역에서 최종 15년형으로 감형

사건 발생 4개월 만인 1993년 2월17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케네스 마클 이병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이후 3월10일 2차 공판, 3월24일 3차 공판에 이어 4월14일 선고 공판이 열려 재판부는 피고인 케네스 마클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을 그대로 인정해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공판이 열릴 때마다 재판장은 방청객에게 ‘재판부를 믿고 지켜봐달라’는 당부를 해야 할 정도로 법정 안과 밖은 규탄과 항의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특히, 매번 미군 헌병들에 의해 호위된 채 법정에 출두한 피고인 케네스 마클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기는커녕, 모든 증거와 목격 진술을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자 방청객과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심지어 케네스 마클 이병이 자신이 아니라 ‘램버트 상병’이라는 다른 미군 병사가 범인일 것이라고 주장하자 법정 소란은 극에 달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범은 따로 있고 미군측이 진범을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할 만한 사안이었고, 거짓 진술이라면 인면수심 범죄자의 무책임한 능멸적 언행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혹은, 범인이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램버트 상병’에 대해서는 수사 초기에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배제된 이후 철저한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케네스 마클에 따르면 자신은 의무병으로서 우연히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윤금이씨를 만나 부축해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평소 그녀와 알고 지내며 몇 차례 관계도 맺었던 ‘램버트 상병’이 이를 목격하고 쫓아와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윤금이씨가 자신에게 병을 휘두르며 폭행을 하기에 병을 빼앗아 이마를 몇 번 친 뒤 부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아마도 자신이 아닌 ‘램버트 상병’이 한 짓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 자신의 지문이 또렷이 묻은 맥주병이 피해자 시신의 자궁 안에서 발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아마 도하 언론에서 케네스 마클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반성할 줄 모르며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케네스 마클은 무기징역 형에 불복해 즉각 항소했다. 케네스 마클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미국의 공개 사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개정 등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와 집회 및 시위는 계속되었다. 1심 판결 후 5개월 만인 9월24일, 항소심 1차 공판이 열렸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이 이루어지기 한 달 전인 1993년 8월, 미국 정부는 윤금이씨 유가족에게 7천100만원의 민사상 배상금을 지급했고 이 사실은 한국 법정에서의 항소심 재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합의’ 및 ‘공탁금’ 관행과 제도를 두고 있는 우리 형사 소송 절차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를 하거나 가해자가 충분한 금액을 법원에 ‘공탁’하면 그 정상을 참작해 감형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서울구치소 SOFA 수용 사동과 천안소년교도소 SOFA 수용 사동 내부 모습. 윗줄 왼쪽부터 서울구치소의 세탁기 및 주방 싱크대, 천안의 가림대 없는 면회실, 천안의 헬스자전거, 아랫줄 왼쪽부터 천안의 가스오븐·토스터기 등 조리 기구, 천안의 게임기와 모니터, 서울의 침대와 TV. ⓒ 연합뉴스
범인 케네스 마클, 만기 앞두고 가석방돼

항소심 공판에서도 시종일관 음료수 병으로 피해자의 이마를 때린 ‘폭행’ 행위만을 인정하고 살인과 시신 모욕 및 훼손 행위에 대해서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부인으로 일관해온 케네스 마클 피고인은 전혀 책임을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기징역이었던 원심보다 낮은 ‘징역 1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항소심 판결 후 즉각 상고하지 않고 결과를 받아들이려 했던 검찰은 국민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 역시 1994년 4월29일, 15년형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져 모든 재판 절차가 종료되고, 자신이 미군 보호를 떠나 한국 교도소로 이감될 예정임을 알게 된 케네스 마클은 미국 대법원에 자신이 한국 교도소에 수감될 경우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며 미군이 자신을 한국 정부로 ‘신병 인도’하는 조치를 금지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시민들과 단체들이 규탄집회와 성명서 발표 및 시위를 벌이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까지 보내 ‘정의 구현’을 요구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미국 대법원은 케네스 마클의 ‘마지막 꼼수’를 기각했다. 그동안 미군 부대 내에서 미군의 보호하에 있으면서 불구속 상태나 다름없이 재판을 받아오던 케네스 마클은 결국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진 지 18일 만이자 사건 발생 후 1년 6개월 만인 1994년 5월17일, 대한민국 정부로 그 신병이 인도되어 ‘천안소년교도소’에 마련된 외국인용 감방에 수감되었다.

케네스 마클은 천안소년교도소에 수감된 지 1년 만인 1995년 5월5일 어린이날, 감방 동료인 미국인 재소자 더프 리차드와 함께 교도관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유리병을 집어던져 아크릴 창을 깨뜨리고 소화기를 집어들고는 교도관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분사했다. 할리우드 B급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교도소 난동’을 실제로 저지른 것이다. 두 미국인은 이 난동 행위에 대해 공무집행 방해 및 공용물건 손상 행위로 기소되어 징역 8개월을 추가로 선고받게 되었다.

케네스 마클은 잔여 형기를 1년 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되었다.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가석방된 다음 날 그는 미국으로 출국했다.


윤금이씨 사건이 남긴 유산 ‘시민의 힘’  

1992년 윤금이씨 살해 사건을 계기로 각계 각층의 단체로 구성되었던 ‘주한 미군의 윤금이씨 살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미군 범죄 피해자 인권 보호와 SOFA 개정을 위한 상설 조직으로 개편되어 1993년 10월26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로 재탄생되었다. 윤금이씨 살해 사건 이후에도 미군 범죄는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SOFA로 인해 우리 경찰이 미군 피의자를 제대로 상대해 수사하지 못하고 기소 및 재판 과정에서도 주권 국가로서의 당당한 형사 관할권 행사를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다 결국 2000년 2월 이태원에 있는 미군 대상 유흥업소에서 또다시 한국인 여성 종업원이 미군에게 참혹하게 피살당하는 ‘제2의 윤금이 사건’이 발생하자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중심이 된 SOFA 개정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미 양국은 적극적인 개정 협상을 벌인 끝에 2001년 4월, 미군 범죄 피의자를 ‘기소 시점에 한국 정부로 신병 인도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비록 만족스럽거나 충분하지는 않지만 분명 진일보한 한·미 관계요, 대한민국의 주권이 완전한 독립을 향해 성큼 나아간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은 오롯이 윤금이씨의 것이라 할 수 있다. 26년 짧은 삶을 고통과 한숨 속에 지내다 참혹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희생은 그를 한 번도 돌보지 않았던 조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된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Series) 표창원 교수의 사건 추적


1. 악마가 된 외톨이의 빗나간 분노의 돌진
- 1991년 10월 여의도 광장 차량 폭주 사건

2. 미군에 희생된 꽃다운 청춘의 절규
- 1992년 10월 동두천 주한 미군 범죄 희생자 윤금이씨 사건

3. 남자친구의 환심 사려 끔찍한 범행
- 1990년 유치원생 곽재은양 유괴·살해 사건

4. 만삭의 여인이 벌인 잔혹한 범죄
- 1997년 8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사건

5. 자녀 학대가 부른 끔찍한 패륜 범죄
- 2000년 5월 과천 토막 살인 사건

6. 고희 되도록 못 버린 ‘그놈의 도벽’
- 권력자 울리고 서민 웃겼던 대도 조세형 사건

7. 악마로 변한 살인자의 두 얼굴
- 1998년 부천 비디오 가게 살인 사건

8. '살인자' 꿈꾼 소년의 잔혹한 범행
-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다 잠자던 동생 도끼로 내리쳐

9.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아홉 살 때 성폭행당한 여성이 20년 후 가해자 살해 ‘아동 성폭력’ 심각성 알린 김부남 사건

10. '짐승' 의붓아버지 죽인 비운의 여인
- '성폭력 특별법' 탄생시킨 김보은·김진관 사건

11. "유전 무죄, 무전 유죄" 탈주범의 절규
- 1988년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인질범 사건
 

12. 법대 여대생 꿈 짓밟은 판사 장모의 편집증
- 미행과 감시, 위협하다 킬러 고용해 살해

13. 기막힌 살인 누명 쓴 '억울한 3인조'
- 경찰, 가상 사건 꾸며내 범인으로 몰아, 2001년 속초 콘도 살인 암매장 사건

14. 무고한 인명 앗아간 '지옥 지하철'
- 1백92명 사망, 1백48명 부상한 최악의 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15. 탐욕스런 선수들의 썩은 스포츠 정신
- 조폭과 승부 브로커들, 금전 동원해 선수 유혹한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

16. 무참하게 행복 짓밟힌 한 가족
- "웃음소리에 화가 나 살인했다"...2010년 서울 신정동 묻지마 옥탑방 살인 사건

 

 


 

[시사저널 주요 기사]

▶ 문재인 앞에 놓인 세 장의 카드

▶ 안철수 지지 모임, 너무 많아서 탈?

▶ ‘동해’ 홍보 책자에 ‘독도’가 없다니!

▶ 김기덕 감독,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 방식으로 전했을 뿐”

▶ 한국 항구에 쌓이는 일본산 석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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