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멀고 험난한 언론 자유의 길
  • 모종혁 I 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 승인 2013.01.2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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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주말> 사태 일단락됐지만, 검열에 대한 저항 의식 여전히 잠복

한때 홍콩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돌았다. ‘중국을 살펴보려면 <남방주말(南方週末)>을, 중화권 전체를 이해하려면 <아주주간(亞洲週刊)>을 읽어야 한다.’ <남방주말>은 광둥(廣東) 성 광저우(廣州), <아주주간>은 홍콩에서 각각 발간되는 주간지이다.

시작은 <남방주말>이 3년 빨랐다. <남방주말>은 1984년 ‘여기에서 중국을 이해한다’라는 구호 아래 남방신문그룹이 창간했다. 광저우를 비롯한 10여 개 도시에서 동시에 발행되는데, 판매 부수가 무려 1백60만부가 넘는 중국 최대 주간지이다. <아주주간>은 뉴질랜드 사람인 마이클 오닐이 1987년 창간했다. 오닐은 중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아시아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하고 영문판인 <아시아위크(Asia Week)>와 중문판인 <아주주간>을 각각 냈다. 1994년 오닐이 회사를 떠나고 홍콩 일간지 명보(明報)가 운영권을 확보하면서 중화권의 독보적인 권위지로 성장했다.

중국 정부의 언론 검열에 맞서 파업을 단행한 이 지난 1월10일 정상 발행되어 가판대에 놓여 있다. ⓒ EAP 연합
“지난 한 해 기사 삭제·수정 1,034건”

1월6일 중국 당국의 검열에 반발해 시작되었던 <남방주말>의 파업이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이 매체의 위상 때문이었다. 1월3일 <남방주말>에 근무했거나 재직 중인 기자 50여 명은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퉈전 광둥 성 공산당위원회 선전부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무식하고 과도한 행위로 언론을 관리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남방주말>이 준비했던 신년 특집 기사가 선전부 관리들에 의해 제목이 바뀌고 내용을 대폭 수정당했기 때문이다. 중국 내에서 현직 언론인들이 단체로 공산당 고위 관리를 비난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중국에서 공산당 선전부에 의한 보도 검열은 관행이다. 중국공산당에게 언론은 ‘정권 유지 및 정치 선전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은 젊은 시절 자신의 신문사 경험과 마르크스·레닌 언론관을 결합해 중국식 언론관을 수립했다. 그의 언론관은 이랬다. 공산당뿐만 아니라 인민에게 봉사하고 당과 인민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마오는 “정부 정책상의 과오 및 사회의 어려운 면을 파헤치고 언론 자체의 과오에 대한 자아 비평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언론을 정권의 꼭두각시로 만든 이는 바로 마오였다. 마오는 1950년대 대약진운동, 1960~7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언론이 당의 영도 노선과 정책 방침, 정치 임무를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군중에게 전달하게 했다. 이는 1980년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개혁·개방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도 매체를 다양화하고 시장의 파이를 넓혔을 뿐 언론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풀지 않았다.

원래 <남방주말>에 실릴 신년 기사는 민감한 사안이 아니었다. ‘헌정(憲政)의 꿈’을 주제로 ‘헌법이 보호되어야 인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중국인의 꿈은 중화민족의 부흥’이라고 말한 시진핑(習近平) 총서기의 발언으로 바뀌었다. 과도한 검열에 반발한 <남방주말> 기자들은 편집부의 이름으로 ‘지난해 1천34건의 기사가 정부 당국에 의해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고 폭로했다. 매주 발간될 때마다 기사 20건 정도가 당국의 간섭을 받은 셈이다.

<남방주말>은 이전부터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2001년 정부 관리의 잘못으로 농촌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폭력조직 두목이 공안으로부터 고문받았다는 기사를 실은 뒤, 편집국장 첸강(錢鋼)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1면 편집자 천밍양(陳明洋)이 파면당했다. 2008년 티베트 유혈 시위의 배경을 지적한 주필 창핑(長平)은 면직 처리되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단독 인터뷰에 성공했지만, 기사는 곧 삭제되었고, 인터뷰했던 주필은 인사 조치되었다.

정부 당국의 제재와 압박은 <남방주말>이 남방신문그룹 산하 일간지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와 함께 정부 정책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이다. <남방주말>은 광저우의 총편집국 외에 베이징과 상하이,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에 거점을 두고 경제·사회·문화·세계 등 여러 분야에서 중국 전역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특히 민생과 환경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2002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다른 관영 언론이 침묵하는 사안에 대해 홀로 목소리를 내는 <남방주말>을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진보 성향 신문’으로 꼽기도 했다. 주 독자층도 대졸 이상의 지식인들로 중국을 이끌어가는 엘리트 계층이다. 기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수많은 연예인과 유명 인사가 공개 지지에 나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차 한 잔 하자” 통보 오면 다음 단계는 ‘위협’

1월9일 <남방주말> 기자들은 광둥 성 공산당위원회와의 협상 끝에 파업을 풀고 1월10일자 신문을 정상 발행했다. 이번 중재는 후춘화(胡春華·49) 광둥 성 당서기가 직접 주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 서기는 ‘리틀 후진타오’라 불리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심복이다.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제1서기를 지낸 그는 차분한 성격에 업무 처리가 치밀하고 정확해 후 주석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력도 유사하다. 1983년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 공청단에서 시작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시짱 자치구 부서기를 거쳐 허베이(河北) 성장과 서기,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당서기를 지냈다. 이번 사태는 후가 광둥 성 서기로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 터졌다.

후 서기는 지난해 11월 제18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최연소 나이로 핵심 권력 집단인 중앙정치국에 입성했다. 본래 후진타오와 공청단파는 후 서기의 상무위원 승격을 밀었다. 그러나 상하이방과 태자당(太子黨)파가 반발해 중앙정치국 진입에 그쳤다. <남방주말> 파업에 대내외의 시선이 쏠린 또 다른 이유는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군인 후 서기의 대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후 서기는 이번 파업 사태를 매끄럽게 해결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았고, 시진핑 총서기의 의중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도 얻었다. 중국 학계는 시진핑이 당과 정부의 선전 부서를 손질해 새 언론 정책을 실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언론을 감독·관리하는 기관들을 문화부로 통폐합할 예정이다.

<남방주말> 기자들을 비판한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사설 게재 거부 논란을 낳았던 신경보(新京報)도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 신경보는 환구시보의 사설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배치하고 ‘<남방주말> 사건과 관련한 환구시보 사설’이라고 달아 자사와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당국은 사의를 밝힌 다이쯔겅(戴自更) 사장의 자리를 보전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1월13일 <남방주말>을 지지했던 작가 리청펑(李承鵬)이 신작 사인회 중 폭행당하고, <남방주말> 사옥 앞에서 집회를 열려던 인권운동가 등 30여 명이 연행당하는 등 여진은 여전하다. 또, 중국 정부 관료가 <남방주말>에 대해 지지 목소리를 냈던 다수 유명인들에게 ‘차를 마시자’고 잇달아 제의하고 있다. 중국에서 관리의 ‘차 마시자’는 제안은 위협이나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중국에서 언론 자유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지를 <남방주말>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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