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현실은 ‘책임 총리’와 거리 멀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01.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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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총리 후보자 지명을 계기로 본 역대 총리

서울 출생·75세·서울대 법대·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최연소 판사 임용·대법관·헌법재판소장·새누리당 선대위공동위원장·대통령직인수위원장-.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인수위원장의 약력이다. 국회 인준을 받으면 제42대 총리가 된다.

지금의 김황식 총리가 제41대이지만 장면(2, 7대)·백두진(4, 10)·김종필(11, 31)·고건(30, 35) 네 사람이 두 차례 총리를 역임했으므로 38명의 총리가 생기는 셈이다.

국회의 인준 거부와 정치 변혁 등의 이유로 서리(署理)에 그친 인물들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 첫 총리 지명자인 이윤영이 네 차례나 인준을 받지 못한 진기록을 세우는 등 ‘총리서리사(史)’는 굴곡 많은 한국 근대 정치사의 또 다른 축소판이다. 절차를 기다리느라 서리 꼬리를 다는 의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이승만 대통령 당시의 신성모·백낙준·허정, 4공 말기의 박충훈, 5공의 이한기, 김대중(DJ) 정부의 장상·장대환 등 상당수 서리에는 온갖 비화가 깃들어 있다.

건국 이래 제41대 총리까지 나왔지만 부여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 총리는 거의 없었다. 초대 이범석, 제31대 김종필, 제36대 이해찬 총리 정도가 이른바 ‘책임 총리’였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총리다운 총리가 되고자 했던 이회창 총리는 청와대의 일격을 받고 취임 5개월 만에 하차해야 했다(왼쪽부터 이범석·김종필·이해찬·이회창 총리). ⓒ 시사저널 이종현·연합뉴스
김용준 인준 무난? ‘서리’에 그친 이도 많아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신현확 총리가 사임하자 총리서리가 된 박충훈은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는 바람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되었다. 허정은 서리로 끝났다가 8년 뒤 공화국이 바뀌면서 ‘정식 총리’가 되었다.

서리 기간도 제각각인데, 민주당 정권 때 김도연은 단 하루 총리서리가 되어 역대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DJ 정부의 파트너인 김종필(JP)은 야당의 반발로 5개월간이나 서리를 달고 있어야 했다. 모양새에 신경을 쓴 김영삼(YS) 대통령은 국회 인준을 받은 뒤에야 총리를 임명했으므로 서리가 아예 없다.

이처럼 사연 많은 총리 인준이지만 김용준 후보자의 경우 낙마할 가능성은 작다. 재산이 ‘많고’ 자신과 두 아들 모두 군대에 안 갔다는 등 다소의 시빗거리가 없지는 않으나 문제 될 정도는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정치적 야심이 없는 고령인 데다 장애를 극복하고 약자 편에 선 감동의 스토리를 지닌 인물이기에 야당도 함부로 나서기 어려운 상대이다. ‘책임 총리’에 걸맞느냐는 것은 얘기가 되지만, 인준 여부와는 다른 부분이다.

사실 박근혜 당선인이 후보 시절 ‘총리의 권한 강화’를 공약했다는 데서 비롯한 언론의 ‘책임 총리’ 보도는 ‘그냥 해본 말’이라고 치부하면 된다. ‘작은 청와대-강한 내각’도 책임 총리와의 연관 속에서 나오는데, 마찬가지다.

‘책임 총리는 없다’고 보는 것이 적확하다. ‘책임 총리’라는 말은 헌법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고 내보이기 위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우리와 같은 대통령 절대 우위의 체제에서 책임 총리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하물며 서슬 퍼런 박근혜 대통령 치하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터이다.

책임 총리의 흔적은 김대중 대통령 당시의 JP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이해찬 총리에게서 보이지만, 이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JP의 경우는 DJ의 정권 쟁취 파트너이기에 가능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책임 총리의 전형은 이해찬 총리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경우는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 자세 외에 취약한 정치 기반이 적잖이 작용한 듯하다.

내각책임제하의 장면 총리는 아예 언급할 필요가 없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대 이범석 총리가 책임 총리에 해당할 듯싶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윤영 지명자가 비토되자 조선민족청년단(族靑)을 이끌던 광복군 출신 이범석 장군을 내세워 인준을 받았다. 백마를 타고 중앙청에 등청하던 철기(鐵驥, 이총리 아호)는 국방장관까지 겸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원외)자유당을 창당하면서 실세 중의 실세로 행세했으나 2인자의 부상을 경계한 대통령은 단숨에 그를 날려버렸다. 책임 총리 담론을 허망하게 만드는 철기의 ‘팽(烹)’ 사례는 한갓 옛날 얘기가 아니다. 책임 총리를 지향하려다 YS의 ‘단칼’에 당한 이회창 총리도 있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주제를 모르고…”라는 한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새삼 설명할 나위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총리의 위상과 관련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도 그렇다. 왕조 시대의 영의정에 비유한 것인데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턱도 없다. ‘의전(儀典) 총리’ ‘대독(代讀) 총리’가 다수였던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는 고분고분하게 대통령을 받들고, 일반 행정을 챙기면서 유사시에는 몸을 던져 야당의 공세를 막아주는 ‘방탄 총리’를 바란다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헌정 사상 초기의 총리는 대개가 정치권에서 배출되었다. 출신 지역은 별다른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신임이 최우선 요소였다. 그러다가 5공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몇 가지 트렌드가 생겼다. 직업군으로는 교수(총·학장), 대법관, 관료가 주 발굴원이었다. 명분과 모양새가 그럴듯하고, 차기에 대한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지역적으로는 호남 출신 여부, 출신 학교로는 서울대 여부 등이다.

김용준 후보자는 대법관·서울대 출신으로 두 가지가 ‘일치’한다.

5공 이후 역대 총리 가운데 법관 출신은 이회창(26대), 김석수(34), 김황식(41) 등이다. 수십 년간 홀로 재판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비판도 있으나 대통령으로서는 여러모로 ‘편한’ 그룹이다.

대부분은 ‘의전’ ‘대독’ 총리

대학 총·학장은 특히 5공 이래 총리 배출 주 직군이 되었다. 군 출신 대통령의 격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학계 출신이 대거 기용되었다. 제16대 김상협 총리를 필두로 이현재(20)·노재봉(22)·정원식(23)·현승종(24)·이영덕(27)·이홍구(28)·이수성(29)·정운찬(40) 총리가 그들이다. 관료 출신으로는 제18대 노신영 총리를 비롯해 고건(30, 35)·한덕수(38)·한승수(39) 총리가 있다. 군 출신으로는 제19대 김정렬 총리와 강영훈(21)·황인성(25) 총리가 있는데 이들도 ‘군(軍) 냄새’가 덜 나는 인사들이다. 정치인으로는 군 출신이기도 한 JP·박태준 외에 이한동(33) 등 세 사람은 DJP 연합정부의 산물이어서 부류를 일반화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굳이 정치인을 꼽는다면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한명숙 총리 정도라고 보면 된다.

DJ 정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를 영남 출신이 석권하면서 단골 메뉴가 된 것이 ‘호남 총리’이다. 김상협 총리가 첫 호남 출신 총리다. 김총리를 바로 이은 진의종 총리(17)와 황인성·고건·한덕수·김황식 총리의 고향이 호남. 호남 총리론은 실제 인사와 상관없이 이곳 출신의 기용을 기대하는 일각의 ‘띄우기’적 측면도 없지 않다. DJ 정부 출범 때까지 자신이 호남 출신임을 가렸던 한총리의 경우에서 미루어 짐작하듯 그 집요함은 상상이 된다.

출신 학교로는 서울대가 압도적이다. 장면(농대)·김종필(사대)·신현확(법대)·진의종(법)·노신영(법)·이현재(상대)·노재봉(문리대)·정원식(사)·현승종(법)·이회창(법)·이영덕(사)·이홍구(문리)·이수성(법)·고건(문리)·이한동(법)·이해찬(문리)·한덕수(상)·정운찬(상)·김황식(법) 등 역대 총리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번 김용준 후보자를 합치면 서울대 법대 출신은 9명이나 된다. YS 시절에는 첫 황인성 총리를 제외한 5명의 총리가 모두 서울대 출신이었다.

임기 국무위원 제청권, 해임 건의권을 지니는 대통령 다음 가는 행정부의 2인자이지만 총리 자신을 보장하는 장치는 없다. YS 당시 이회창 감사원장이 총리에 임명된 것도 실은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에서 빼내기 위한 에둘림이었고, 헌법이 명시한 총리 권한을 ‘진짜’ 행사하려 나서자 즉각 들어낸 것이다.

이런 총리인지라 임기는 그야말로 들쭉날쭉하다. 수개월짜리 총리가 무수하다. 단임제 5년 임기 대통령들의 총리가 5명 안팎임을 감안하면 굳이 재임 기간을 나열할 필요도 없다. YS 시절은 6명이나 되고, 현 이명박 정부의 총리는 3명이다. 걸핏하면 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하는 정치 풍토는 문제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국정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도 총리의 무게 내지 한계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국무총리는 행정부의 2인자, 국무회의 부의장으로서 각 부처를 지휘 감독하고 대통령 궐위 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는 막중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헌법에 명문화된 국무위원 제청권 등은 말뿐이다. 지난 1월15일 세종시에서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처음 열린 국무회의장의 김황식 총리(맨 오른쪽). ⓒ 연합뉴스
정일권, 6년 7개월 ‘최장수’

총리 재임 기간과 관련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예외의 경우이다. 1963년에서 1975년 3공화국 기간 동안 4명의 총리가 전부이다. 잠시 스쳐간 최두선·백두진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을 정일권·김종필 총리 두 사람이 채웠다. 한번 사람을 쓰면 믿는 박 전 대통령의 스타일이 그대로 읽혀진다. 정일권 총리는 1964년 5월10일 취임해 6년 7개월 넘게 재임했다. 정총리는 1970년 12월10일 퇴임했는데 ‘본인이 관련’된 그해 3월17일의 ‘정인숙 여인 권총 피살 사건’이 아니었다면 더 장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JP는 1971년 7월10일부터 1975년 12월18일까지, 그리고 DJ 정부 시절 1년 10개월간(서리 포함) 재임했으므로 도합 7년 3개월여 동안 총리를 지낸 셈이다.

2인자를 용납 않고 철저히 분할 통치하는 용인술과 함께 일단 신임하면 자리를 보장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타일은 시사점이 많다. 선친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 박근혜 당선인의 인사 모형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2대 최규하·제14대 남덕우 총리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최총리는 4년간의 외무부장관을 지내고 4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박대통령이 시해된 뒤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데 이어 제10대 대통령(1979년 12월21일~1980년 8월15일)이 되었다. 남총리는 1969년 10월부터 5년 가까이 재무부장관, 이후 1978년 12월까지 부총리 겸 기획원장관을 지냈다. 10년 세월 동안 한국 경제를 관장했고 총리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5년 단임의 박근혜 대통령이기에 선친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지만, 수시로 총리·장관을 갈아치우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김용준 후보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록을 세우고 있다. 첫 ‘장애인 총리’와 함께 최고령 총리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제25대 현승종 총리의 당시 나이는 72세로 취임 시 기준 최고령이다. 고령이라던 제19대 김정렬 총리는 70세, 제21대 강영훈 총리는 고작 66세였다. 자연 수명이 길어진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후보자의 75세는 결코 만만치 않다. 국정을 총람하는 데는 일정 부분 한계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은 그래서 나온다. ‘법치와 약자 보호’를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김용준 총리는 역시 ‘얼굴형(?)’에 ‘관리형(?)’을 일부 보탠 형태가 아니겠느냐는 관측도 같은 맥락이다. 무리하지 않고 ‘의전 대독 총리’로서 차분하게 서정(庶政)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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