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역회사가 신문 기사도 써준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4.0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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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지역 신문들, 경영 어려워지자 편집국 없애고 외부에 기사 맡겨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 출신 대학생인 토어벤 클라우사 씨의 가족은 오랫동안 지역 일간지인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를 구독했다. 클라우사 씨는 대학 진학 후 자취를 시작하면서 전국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을 보기 시작했지만 고향에 남은 부모님은 지역 신문을 고집했다. 지역 정치 소식과 각종 생활 정보뿐만 아니라 국내외 주요 뉴스도 두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클라우사 씨 부모님은 다른 지역 신문을 받아보기 시작했다. 올해 초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의 소유주인 WAZ 미디어그룹이 신문사 편집국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120여 명의 정규직 기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 사건이다.

미디어그룹인 WAZ가 지역 신문인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의 편집국을 없앤 데 대해 비판이 일고 있다. ⓒ DPA 연합
사설 언론사무소가 기사 제공

WAZ 그룹은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유럽 각국에 30여 개의 지역 일간지와 주간지를 소유한 대형 언론 기업이다. 클라우사 씨의 가족이 살고 있는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에서만 4개의 지역 일간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총 발행 부수는 1일 70만부에 이른다.

WAZ 그룹은 신문사 편집국을 해체한 초유의 구조조정에 대해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가 지금까지 500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해 부담이 됐다”고 해명했다.

WAZ 그룹은 비난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3월20일 추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뉴스를 수집·분석해 여러 신문사에 분배하는 콘텐츠 데스크와 WAZ 그룹 소유의 광고 신문 및 광고 집행부 등에서 200여 개의 일자리를 없앤다는 내용이었다. 베를린에 사는 주부 시빌레 홀츠바우어 씨는 “편집국이 없으면 누가 신문을 만든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런 신문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WAZ 그룹의 결정에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독일 언론인조합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지부(DJV-NRW)는 성명서를 통해 “고유한 내용도, 의견도, 관점도 제공하지 않는 신문을 사 볼 이유가 어디 있겠나. WAZ 미디어그룹은 편집국 없는 신문, 사이비 신문을 발명한 기업으로 남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질케 벤더 DJV-NRW 대변인은 서면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는 언론사들이 인쇄 매체, 특히 일간지를 언론이 아닌 단지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우려를 표했다.

WAZ 그룹의 결정은 ‘편집국 없는 신문을 발행하겠다’로 요약할 수 있다. 편집국이 없는 신문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구조조정안을 내놓은 이후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는 여전히 지역 소식과 주요 시사 뉴스를 골고루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문 외주 제작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자매지의 기사로 ‘돌려막기’를 하는 데다 심지어 경쟁지로부터 지역 소식을 공급받기도 했다.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는 신문 외주 제작의 극단적인 사례다. 그러나 다른 지역 신문들에서도 외주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터넷 뉴스에 젊은 독자층을 빼앗기고 지면 광고 수익이 떨어지면서 생긴 일이다. 이런 현상은 독일 신문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영난에 처한 언론사들은 콘텐츠에 투자하는 대신 인력을 감축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언론의 품질 저하, 다시 독자층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신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신문들은 지면을 채우는 데 급급한 상황이다. WAZ 그룹은 지난해 12월 독일 최대 규모 통신사인 독일통신사(dpa)와 기사 전재 계약을 체결했는데, 4년 만의 일이었다. 언론사가 대형 통신사로부터 뉴스와 보도사진을 공급받는 일 자체는 일반적이다. 질케 벤더 대변인 역시 “통신사들은 늘 일간지에 자료를 공급해왔으며 이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통신사는 말 그대로 참고 자료를 제공할 뿐, 이를 바탕으로 고유의 시각을 담은 기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론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벤더 대변인은 “과거 WAZ는 자사 기자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편집국이 없어지면 이런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독일 언론계에는 이미 이를 겨냥한 틈새시장이 존재한다. ‘사설 언론사무소’다. 법률 시장에 개인 변호사 사무소가 있듯이 독일에는 프리랜서 기자가 개인 사무실을 차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전직 기자인 미햐엘 브라운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전직 일간지 기자 출신인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경제 전문 언론사무소인 ‘비지니스 리포트’를 운영 중이다. 그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전에 다니던 신문사가 문을 닫고 다른 도시의 신문사 정규직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더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싫어 프랑크푸르트에 사무실을 차렸다”고 밝혔다. 그는 언론사무소를 “통신원을 둘 여유가 없는 매체를 위한 일종의 프리랜서 통신원사무소”라고 설명했다.

브라운 씨의 언론사무소는 기사뿐 아니라 ‘개성’도 빌려준다. 대형 통신사와 다르게 보도보다는 논평을 전문 분야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 논평을 여러 매체에 팔기도 하지만, 한 지역에서 중복돼 출판되는 일이 없도록 조정한다. 독자들에게 그의 글이 오직 그  매체에만 실린다고 생각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주 제작된 기사와 논평이 지역 언론 고유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브라운 씨도 이런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나도 어디까지나 프랑크푸르트 금융계의 관점을 소개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지역 뉴스에 초점을 두는 신문에는 글을 낼 수 없다”고 밝혔다.

시장이 직접 나서 “문 닫지 마라”

베스트팰리셰 룬트샤우의 편집국 해체 사건은 외주 기사에 기댄 지역 일간지의 붕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한 신문의 소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역 일간지의 위기는 지역 정치 위기로 직결되고 있다. 지방자치가 활발한 독일이지만 주민들이 지역 정치인들의 활동을 감시할 통로가 원천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독일 본 대학의 법대생 한노 마그누스 씨는 필자에게 “이 도시의 지방의회 의장이 누군지 아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지역 신문을 읽지 않으면 독일연방 총리가 누군지는 알아도 정작 자기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지역 정치인에는 무관심해진다”고 말했다. 마그누스 씨는 지역 일간지 하나와 주간지 <디 차이트>를 구독하고 있다.

WAZ 그룹이 추가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자 그 이틀 후인 3월22일 인구 9만명 규모의 소도시 마를의 베르너 아른트 시장이 이 기업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마를에 위치한 WAZ 그룹 편집국 지부가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른트 시장은 “WAZ 그룹이 편집국을 폐쇄하고 독자적인 취재 보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지역의 민주주의가 훼손됩니다. 민주주의는 투명성·대화·다양한 의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공적이고 비판적으로 동행하는 미디어가 필요합니다. 편집국을 문 닫지 마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시장의 간절한 외침에 WAZ 그룹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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