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개그’에 풍자는 없고 눈치만 있다
  • 김원│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7.0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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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기 어려운 시대…야하되 통쾌한 코미디물 안 나와

웃고 싶다. 정말이지 모든 걸 잊고 활짝 웃고 나면 몸과 마음의 주름살도 잠시 펴질 것 같다. 주말 늦은 밤에 <SNL코리아>(tvN)나 <개그콘서트>(KBS)를 시간 맞춰 시청하던 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본격 코미디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은 여기저기 많은 것 같은데, 시청자 입장에서 2013년 여름은 좀 난감하다. 신설 코미디 프로그램도 늘어나고 새로운 코너도 많아졌다는데,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는, 그야말로 ‘웃기엔 좀 애매한’ 상황이다.

‘희극론’에 대한 명저인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웃음- 희극의 의미에 대한 시론>(1900년)은 웃음이 얼마나 사회적인 것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을 떠나서는 희극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부터가 그렇다. 무엇보다 ‘왜 우스운 것이 우리를 웃기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했다. “어째서 우리는 머리칼이 갈색에서 금발로 바뀌면 웃는가? 딸기코의 우스꽝스러움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야말로 ‘웃을 줄 아는 동물’인 인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사람이 웃는 이유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사람이 왜 웃는가에 대한 논의는 진지할 수밖에 없다. 웃게 만드는 콘텐츠를 제작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인간 탐구의 가장 밑바닥까지를 고민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희로애락이나 생로병사의 비밀과 순리를 이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아니 이 사회 성원 전체를 웃게 만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최근 출연자들의 야한 장면이 화제가 된 코미디 프로그램들 중 KBS 의 ‘씨스타29’ 코너. ⓒ KBS 제공
정권 교체 직후라서 시사 풍자 어렵다?

“다만 몇 분만이라도 이 애착을 잊어버리고 연민을 침묵시켜야”만 웃을 수 있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헤아린다면, 어쩌면 2013년 지금은 웃어야 할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연민을 멈추고 무감각해져야 하는 웃음의 속성 때문이다. 무감각의 대가까지 생각해야 하는 위험 부담마저 시청자의 몫이 된 탓이다.

대놓고 야하고, 작정하고 깐족거리며 19금 성인 풍자물을 표방했던 <SNL코리아>는 최근 3주간 휴면에 들어갔다. 7월 시즌5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말도 설득력 있다. tvN 사주에 대한 검찰 조사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입장 표명도 있었다. 하지만 수사 발표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누가 봐도 재미보다 몸 낮추기가 먼저 보인다.

지난 대선 기간 그렇게 우리를 웃게 했던 ‘여의도 텔레토비’의 후속편인 ‘글로벌 텔레토비’는 가장 먼저 결방당했고, 풍자는 빠진 단지 야한 ‘19금(禁)’이 화면을 채웠다. 어쨌든 쭉 유지돼왔던 균형은 살짝 깨진 상태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던 얄미운 번득임, 야하면서 웃기고 통쾌한 19금 풍자물이야말로 사회 분위기를 민감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의 주역 중 하나인 장진 감독은 최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되게 위험한 수거든요. 19금을 표방한 채로 아주 선정적인 표현을 전면에 내세워 코미디를 한다는 것이…. 영양가 있게 딱 배치되면 모르는데, 너무 전면에 가면 만드는 사람들도 힘들어지거든요. (수위를) 조율해야 되는데, 균형감이 너무 쏠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때도 있고요.”

장 감독은 풍자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단지 시대가 좀 도와주는 게 있어야 되는데요. 대중매체 안에서의 풍자가 또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되면 아마 재미있게 잘할 것 같아요. 그리고 풍자는 권력 집단을 향해야 되는데. 정치적 중립이니 균형 감각이니 하면서 그걸 맞추다 보면, 보는 사람들은 재미없어지고요.”

그의 말은 ‘19금 풍자물’의 현 단계 고민과 한계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성인물을 성인답게 재미있게 향유하려면, 풍자가 풍자로서 우스워지려면, 그야말로 사회 분위기가 아니 ‘시대가 도와주는 게 있어야’ 한다는 점에 백 번 공감한다. 마음 놓고 함께 웃을 수 있기란 이렇게 여러 조건이 동시에 갖춰져야 가능해진다. 웃음의 까다롭고 복잡한 메커니즘이다.

반석에 오른 듯 보였던 <개그콘서트> 또한 요즘 딜레마에 빠졌다. 신설되고 폐지되는 코너들의 순환이 대단히 빨라진 것도 <개그콘서트>가 안고 있는 깊은 고민을 드러낸다. 때로는 ‘외압’ 논란으로, 때로는 ‘시청률 압박’으로, 혹은 ‘특정인 비하’ 논란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일도 잦아졌다. 웃기는커녕 울어야 할 상황이다.

날카로운 풍자와 천연덕스러움이 교차하던 왕년의 히트작 퍼레이드였던 700회 특집 방송에서야 오랜만에 시청률이 되살아났다.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이래야 개콘이지’ 등등 시청자들의 반응은, 코미디언들 입장에서는 뼈아픈 것이다. 지금은 뭔가 웃기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차라리 예전의 코너가 더 웃기다는, 이 ‘과거의 영광’에 대한 예찬은 질책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tvN ‘응교’ 코너. ⓒ tvN 제공
코미디여, 남성적 힘을 회복하라

애시청자였던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진단해본다. <개그콘서트>는 언제부턴가 여성적 스토리텔링으로 선회했다. 딱히 어떤 한 코너가 그렇다기보다는, 조곤조곤 이야기의 그물을 짜는 방식의 깨알웃음이 전체적인 분위기로 읽힌다. 그러나 시청자는 깨알웃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웃고 싶다. 세상이 진동하도록! 나 혼자만 알아듣고 킬킬거리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박장대소하는, 제대로 된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어떠한 논란이나 비하가 없게끔 자체 검열을 강화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전달되는 깨알웃음으로는 야밤의 시청자를 잡을 수 없다. 시청자는 웃음에 굶주려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웃음을 원한다. 코미디여, 부디 본연의 남성적 힘을 회복하라. 세상에서 제일 큰 풍차와 싸우며, 그 무모함으로 세상을 배꼽 잡게 하는 돈키호테의 호방함을 보고 싶다. 지치지 않는 자, 마침내 세상을 웃게 하리니. 제발 우리를 웃겨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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