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땅’에 생기가 돌더라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8.2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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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국경 답사기 낸 황재옥 평화협력원 소장

14년 만이다. 다시 국경에 섰다. 저기 압록강 너머로 ‘금기의 땅’ 북한이 보였다. 놀라웠다. 멀리 강변을 오가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1998년 답사 당시 봤을 때와 달랐다. 자전거를 탄 주민이 많았다. 어린이들은 알록달록 수영복과 튜브를 끼고 물놀이를 했다. 파스텔 톤의 화려한 복식으로 치장한 여성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주민들 신체 조건이 좋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통과한 직후, 왜소한 몸집으로 멍하니 중국 쪽을 바라보던 주민들은 이제 거기 없었다.

중국-북한 접경 지역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곳을 몸소 답사한 황재옥 평화협력원 소장의 결론이다. 북한 정치·인권 전문가인 황 소장은 지난해 8월3일부터 11일까지 8박 9일 동안 국경을 찾았다. 세 명의 전임 통일부장관을 포함한 다섯 명의 북한 전문가들과 함께 답사팀을 꾸렸다. 답사팀은 압록강 하구 단둥(丹東)에서 두만강 하구 팡촨(防川)까지 총 1376.5km 거리의 접경 지역을 둘러봤다.

황 소장은 국경 너머로 바라본 북한 마을의 풍경과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중국 접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나 정보원들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결과물이 최근 발간된 책 <국경을 걷다>에 담겼다. 황 소장은 “남북 관계가 고착된 상황에서 북-중 관계 발전과 변화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었다.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한 내용을 책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중국의 인프라 투자 규모 상상 이상

국경은 분리의 선인 동시에 접촉의 선이다. 이미 1998년 북-중 접경 지역을 방문해본 경험이 있는 황 소장은 이번 답사에서 놀라움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극도로 폐쇄된 사회로 악명 높은 북한이지만, 전통적 혈맹 관계인 중국을 상대로는 개방의 문을 크게 확대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 소장은 중국 변방의 인프라 투자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상을 목격했다. 그 발전 속도가 빨랐다. 중국이 단순히 북한과의 교역·교류 확대 목적을 넘어, 그동안 낙후된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을 발전시키는 과업과 연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북-중 간 교통망 건설 작업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규모가 크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 소장은 “1998년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길이 없어 답사에 애를 먹었다. 지도를 봐도 장소를 찾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도로망이 뻥 뚫려 있었다. 중국은 2015년까지 북-중 접경 지역의 철도와 도로 건설에 2015년까지 100억 달러(약 11조원 상당) 이상을 투입할 예정이다. 두 나라의 경제 협력이 단순한 교역 차원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었다”고 말했다.

황 소장은 중국이 북한과의 ‘혈맹’ 관계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려는 모습도 이번 답사에서 확인했다. 중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을 도왔다는 것을 알리는 각종 기념 동상·비석·상징물을 수차례 만날 수 있었다. 황 소장은 “중국인들에게 ‘사회주의·애국주의’를 고취하면서 북-중 관계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특수한 관계였음을 학습시키는 현장이었다. 항미원조·조중혈맹을 강조하면서 북-중 관계를 주도적으로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중국의 전 방위적 대북 접근 정책이 향후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 소장은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에게 북한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별한 국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정치적인 혈맹 관계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만약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중국을 잘 활용하면 경제적·정치적으로 근근이 체제를 유지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북한과 중국은 결국 자신의 국익을 위해 양국 관계를 진행해나가겠지만, 중국의 적극적인 대북 접근과 대북 정책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접경 지역의 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 이외에는 식량 배급 원활하지 않아

황 소장이 접한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도 인상적이다. 북한 주민들의 밝은 옷차림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먹고사는 형편이 나아졌음을 볼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의 극심한 식량난이 언제 있었나 싶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만난 대북 사업가들에 따르면, 식량 배급이 평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식량 사정이 1990년대 중반보다 나아지기는 했으나 아직 모든 주민이 골고루 먹고살 만큼은 아닌 셈이다. 이로 인해 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주민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북한 사회에 자본주의 질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황 소장은 앞으로도 북-중 접경 지역을 자주 찾아 현상을 관찰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 변화의 속도가 아주 빠르다는 사실을 이번 답사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황 소장은 “중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이 변방의 오지까지 이르고 있다. 그 물결이 북한까지 이어진다. 접경 지역에서 중국이 만들어내는 활기가 반갑지만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남북 교류가 교착된 상황에서, 북-중 간 활발한 교류는 향후 남한이 대북 관계를 운영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번 개성공단 정상화를 계기로 남북 관계가 점진적으로 화해·협력 쪽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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