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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절규, 그들은 이제야 들었나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의 <노예 12년> 아카데미 작품상

이은선│매거진M 기자 ㅣ 승인 2014.03.11(Tue) 1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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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의 인간 드라마가 승리했다. 3월2일(미국 현지시간) 열린 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노예 12년> 얘기다.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그래비티>를 제쳤다. 무대에 오른 스티브 맥퀸 감독은 극 중 대사를 인용한 수상 소감을 남겼다. “모든 사람은 단순히 생존(survive)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live) 자격이 있다. 노예 제도로 고통받았던 이들에게 이 상을 바친다.”

이날 <노예 12년>은 각색상(존 리들리)과 여우조연상(루피타 뇽) 트로피까지 거머쥐며 3관왕을 차지했다. 아카데미가 시상식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뿐 아니라 배우의 연기 부문에서도 <노예 12년>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덴젤 워싱턴과 할리 베리가 남녀주연상을 차지하면서,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흑인 배우가 주연상을 모두 휩쓴 2002년 이후 또 한 번 ‘블랙 파워’가 발휘됐다.

   
<노예 12년> ⓒ ㈜판씨네마 제공
흑인 감독이 만든,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를 다룬 영화의 손을 들어준 것은 보수적인 아카데미로서는 이례적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에는 매해 상을 줄 만큼 비상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정작 미국 역사의 한 부분인 흑인 노예 역사에 대해 아카데미는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올해도 다큐멘터리 단편 부문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다룬 <레이디 인 넘버 6>에 상을 챙겨주며 아카데미는 유대계에 대한 애정이 변함없음을 표시했다.

어쨌든 <노예 12년>은 아카데미 역사상 흑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를 남겼다. 1992년 존 싱글턴 감독의 <보이즈 앤 후드>(1991년), 2010년 리 대니얼스 감독의 <프레셔스>(2009년)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 적은 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두 영화 모두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흑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노예 12년>은 1841년의 미국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뉴욕에서 자유인 신분으로 행복한 가정을 일구며 살던 바이올리니스트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은 백인 사기꾼에게 납치돼 노예로 팔려간다. 이후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지옥 같은 노예의 삶을 산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 그는 점차 노예 제도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겪게 된다. 이후 한 캐나다인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하기까지 그는 무려 12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실존 인물 솔로몬 노섭이 집필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160년이 지난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솔로몬의 용기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공감대를 동시대 관객과 나누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소재였지만 제작자 브래드 피트가 든든하게 도왔다.

“마땅한 작품이 트로피 가져갔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첫 번째 장편영화 <헝거>(2008년)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이 영화는 독립투쟁을 하다 투옥된 IRA(아일랜드 공화국군) 요원이 정치범 지위를 요구하며 옥중 시위를 벌였던 실화를 극화한 것이다. 단식투쟁에 돌입한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빈더)를 중심으로 이념 투쟁의 이면을 생생하게 다뤘다는 평을 받았다. 맥퀸의 두 번째 장편영화 <셰임>(2011년)은 뉴욕의 섹스 중독자 브랜든 설리반(마이클 패스벤더)의 이야기다. 그는 죄의식과 추잡한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소재는 다르지만, 스티브 맥퀸 감독이 늘 인간의 자유 의지와 생존의 조건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선보였음을 알 수 있다. 

맥퀸의 세 번째 장편 <노예 12년>은 그 일관된 흐름을 훌륭하게 잇는 작품으로 보인다. 흑인 감독이 연출한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지만 영화는 섣불리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손쉬운 방식으로 관객을 동요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건조하리만큼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의 야만적이고 혹독한 시대상을 엄중하게 목격하도록 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면서 간단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생존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가 깃든 삶인가.

   
스티브 맥퀸과 배우 브래드 피트는 <노예 12년>의 감독과 제작자로 작품상을 받았다(왼쪽에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 AP연합
시상식 직후 쏟아진 외신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흑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이 주목할 만한 사건이긴 하지만, 마땅한 작품이 트로피를 가져갔다는 데 동의하는 분위기다. 극장가는 이른바 ‘오스카 효과’로 한껏 달궈졌다. 미국에서는 이미 지난해 10월에 개봉한 이 영화의 극장 매출이 시상식 직전 주말에 전주 대비 80% 이상 증가했다. 시상식 직후 상영관은 2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3월4일자 신문을 통해 1853년 1월20일자 기사를 정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솔로몬 노섭의 인생 역정을 소개한 기사의 제목과 본문에서 그의 이름을 표기한 철자가 각각 다르다며 정정 보도를 냈다. 아카데미 시상식 결과로 말미암아 벌어진 뜻밖의 사건인 셈이다.

<노예 12년>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흑인 영화는 아니다. 한국에서 전부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최근 몇 년 사이 북미에서는 흑인 영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2013년은 ‘블랙 필름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노예 12년>을 비롯해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블랙 네이티비티> 등 다양한 작품이 쏟아졌다. 모두 흑인 감독이 만든 영화다. 이 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지난해 1월 열린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받으며 이목을 끌었다. 2009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실화를 다룬 작품으로 열차 내 싸움의 주범으로 지목된 흑인 중 한 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한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쏟아진 블랙 필름이 단순히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데 그친 것은 아니다. 스포츠·뮤지컬·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돼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의 이야기를 다룬 <42>가 대표적인 예다. 메이저리그 붐을 타고 북미에서 크게 흥행했다. 여름에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가 3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고 이후 가을에 개봉한 코미디

<더 베스트 맨 홀리데이>가 흥행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영화는 모든 출연진이 흑인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미국의 유력 배급사 폭스 서치라이트는 아예 9월부터 11월까지 매달 한 편씩 블랙 필름을 개봉하는 전략을 선보이기도 했다. 9월에는 <배기지 클레임>, 10월에는 <노예 12년>, 11월에는 가족 뮤지컬 <블랙 네이티비티>가 개봉됐다. 지난해 11월 북미에서 개봉된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은 이 흐름에 정점을 찍는 영화였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삶을 그린 드라마로 만델라가 집필한 자서전이 원작이다. 주연 배우 이드리스 엘바의 연기에 관한 찬사와 더불어 연말 만델라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2013년은 ‘블랙 필름 르네상스’

흑인 영화 열풍은 이른바 ‘오바마 효과’로 불린다. 실제로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흑인 영화가 부활했다.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럭비 월드컵 이야기를 다룬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2009년), 절망에 빠진 흑인 소녀 프레셔스의 희망 찾기를 그린 <프레셔스>(2009년), 흑인 가정부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려는 백인 여성의 이야기 <헬프>(2011년) 등이 이어졌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이 같은 흐름이 2013년 흑인 영화 열풍의 단초가 됐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1980년대와 90년대 스파이크 리와 존 싱글턴 감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흑인 영화는 인권운동의 측면에서 다뤄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보이즈 앤 후드>(1991년) <말콤 X>(1992년)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프레셔스>를 연출한 리 대니얼스 등 다양한 관점에서 흑인 영화를 만들려는 신진 감독들이 부상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용서나 화해, 사랑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품은 영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의 주연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는 “흑인 영화가 과거와는 달리 힐링의 단계로 진화했다는 점이 최근 눈에 띄는 트렌드”라고 말했다.

흑인 영화 열풍은 올해도 이어질 전망이다. 가을께는 범죄 스릴러 <더 이퀄라이저>가 개봉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방영한 동명 TV 시리즈가 원작이다. 국내에는 <맨하탄의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 전직 비밀요원 로버트 맥콜이 사립탐정으로 활약하는 이야기로 덴젤 워싱턴이 주연을 맡았다. 미국의 흑인 육상 영웅 제시 오언스의 전기 영화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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