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반전’을 보여라
  • 김재태 편집위원 ()
  • 승인 2014.03.2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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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연은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이름이 알려진 시인입니다. 살아생전에 일본 특유의 정형시인 단가(短歌, 일본어로 단카)를 2500여 편이나 남겼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에서 다룬 주제는 사랑과 평화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인류애를 향한 시심이 가득합니다. 지난 2004년 7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회견장에서는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절실한 소원이 하나 있지 다툼이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라는 그의 시를 인용하면서 양국 우호의 중요성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모전여전’이랄까. 고 손호연 시인의 딸인 이승신씨도 시인으로 활동하며 어머니가 생전에 시로 외친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 3월에도 대지진과 쓰나미 참사를 당한 일본 동북부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시 낭송회를 열며 피해 주민들의 낙담한 마음을 따뜻이 어루만졌습니다.

지금은 한·일 양국의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꽁꽁 얼어붙어 있지만, 꼭 냉기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북돋워준 이승신 시인처럼 물밑에서는 훈훈한 난류도 흐릅니다. 도쿄 시내에서 벌어지는 혐한(嫌韓) 시위의 한켠에서 시위대가 쓴 낙서들을 지우는 일단의 일본인들 모습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 3월10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가보았습니다. 대사관 건물을 다섯 대의 우리 경찰차가 막아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걸쳐준 색동 한복을 입은 ‘평화의 소녀상’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습니다. 주재국의 경찰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 일본 대사관의 풍경속에 현재의 한·일 관계가 상징적으로 녹아 있는 듯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한 이른바 ‘고노 담화’를 재검토하겠다던 아베 총리가 최근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일 관계에 새로운 국면이 조성된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아베 발언이 나온 배경을 따져보면 진정성을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중시해온 일본의 행보에 비춰볼 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한국·일본 순방을 앞두고 나온 일시적인 유화 제스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노·무라야마 담화 계승 이전에 그는 그동안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릴레이 경주를 하듯 내뱉은 망언 퍼레이드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 마땅합니다. 엄연한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이웃 나라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국가 간의 외교에 협약 체결이나 상호 교류 같은 ‘행위’의 외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들을 자극하지 않는 ‘무(無)행위’의 외교도 중요합니다. 행위 외교의 최악이 전쟁이라면 무행

위 외교가 만드는 최상의 결과물은 평화입니다.

정부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아베 정권의 향후 행보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성 있는 후속 움직임이 나타날 때 관계 진전을 추진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의 뇌리에는 아직도 일본의 극우적 행위들로 인한 충격의 여운이 짙습니다. 아베 정권이 진정한 ‘반전’을 보여야만 외교도 살고 평화도 삽니다. 그들이 부디 과거의 잘못을 끌어안고 있다가 미래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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