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없는 권력은 고인 물과 같소이다”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4.04.0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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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정도전>…<기황후>, 시청률 높지만 흥미 위주

<기황후>와 <정도전>이 쌍끌이로 사극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기황후>의 시청률은 20%대 후반으로 30%를 넘보고 있고 <정도전>은 10%대 중후반 정도다. 3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기황후>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1위, <정도전>은 전달에 비해 5계단 뛰어올라 5위에 랭크됐다. 2위부터 4위까지가 <무한도전> <1박2일> <런닝맨> 등 예능 프로그램이어서 드라마 중에선 두 사극이 원투 펀치를 형성한 모양새다. 

특이한 건 <정도전>이다. 10%대 중후반 정도로 그렇게 높지 않은 시청률인데도 드라마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인기를 구가한다는 점에서다. 온라인에서의 화제성이나 매체의 관심도에서 보면 더욱 압도적이다. <기황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주목받으며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인기는 <기황후>, 화제성은 <정도전>인 것이다.

의 주인공 조재현 ⓒ KBS 제공의 주인공 하지원 ⓒ MBC 제공
<기황후>는 처음에 역사 왜곡 논란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화려한 화면과 장쾌한 스케일로 주목받았다. 그동안 아기자기한 퓨전 사극류가 많았기 때문에 오랜만의 서사적인 느낌이 신선했다. 그러다 여주인공이 황궁으로 들어간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궁중 치정 사극이 됐다. 1인자를 가운데 놓고 궁녀와 처첩들이 벌이는 암투가 극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궁중 치정 사극의 대표적인 소재인 매질하기, 독약 먹이기, 저주하기 등이 총동원됐다. 조선 궁중 치정 사극이 회초리로 때리고 지푸라기 인형 정도로 저주했다면 <기황후>는 겉옷을 벗겨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픽 효과를 동원해 더 화려하고 이국적인 저주로 판을 키웠다. 태후는 황후에게 임신을 못하게 만드는 향을 날마다 맡게 하고 황후는 모든 후궁들을 날마다 줄 세워 임신 못하는 약을 먹이는 엽기적인 설정까지 더해져 안방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런 치정 사극의 구조로 특별한 주목을 받기는 힘들다.

 <정도전> “지금이 고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정도전>은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사극이어서 시작할 때부터 사극 팬과 매체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장희빈이 하이힐을 신고 패션쇼를 하는 등의 퓨전 사극과 로맨스 사극이 득세하는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정통 사극 팬이 소외됐기 때문이다. 최근엔 ‘팩션’이라고 해서 기존의 역사를 비틀어 새롭게 전개하는 것이 유행했고 현대와 과거가 뒤섞이는 ‘타임 슬립’ 형식의 사극도 있었다. 아니면 <추노>처럼 역사의 큰 틀과 거리가 있는 민초에게 주목한 사극도 있었다. 그 와중에 <조선왕조 5백년> 같은 느낌의 정통 사극은 설 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전통 사극 팬은 사료에 충실한 중앙 무대의 정치 투쟁 이야기를 기다려왔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정도전>이 나타났다.

<정도전>은 주로 중년 남성인 전통 사극 팬과 더불어 젊은 네티즌에게도 환영받는다. 그것이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를 일으키며 팬덤이 형성된 요인인데 정도전 역의 배우 조재현은 그 답을 이렇게 내놨다. “지금이 600년 전의 고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말처럼 많은 사람이 옛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보고 있다. 배경은 고려 말이다. 백성은 도탄에 빠졌지만 권문세가의 창고엔 곡식이 그득하고 백성에겐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지만 권문세가는 땅이 넘쳐나 산과 강으로 그 경계를 삼았다는 시절이다. 소득 양극화와 자산(부동산) 양극화. 그로 인한 백성의 절망, 좌절, 분노. 물론 최근엔 고려 말처럼 백성이 길바닥에서 굶어 죽어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요즘 서민들 마음만은 고려 말에 공감한다. 특히 ‘88만원 세대’를 비롯한 네티즌이 그렇다.

과거 1980년대식 사극은 적대하는 두 세력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정치 투쟁만 했다. 오로지 힘의 논리뿐이었다. <정도전>은 다르다. 정치 투쟁을 하더라도 명분을 내세운다. 이성계는 힘이 있어도 새 나라를 설계할 자신이 없어 칼을 뽑지 않다가 정도전이 온 백성이 잘사는 나라의 상을 제시하자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단지 힘만이 중요한 구도가 아니라 정치적 비전, 가치가 중요한 구도인 것이다. 이런 가치의 대립이 현재적으로 잘 구성된 사극은 시청자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인기를 얻은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 등 사극이 그랬고 지금 <정도전>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정도전은 고려 말의 뿌리 깊은 양극화 상황을 단칼에 해결한 혁명가다. 아무도 못 풀 정도로 복잡했던 고르디우스 매듭을 알렉산더 대왕이 단칼에 끊어 풀어버린 것과 비슷하다. 고려 말엔 500여 년간 축적된 시스템의 동맥경화, 켜켜이 쌓인 권문세가의 이해관계, 철옹성 같은 기득권 구조로 인해 개혁이 난망한 상황이었다. 그는 복잡하게 개선안을 짜는 대신 새 ‘포맷’을 선택한다. 기존 제도를 싹 밀어버리고 새 출발을 한 것이다. 네티즌이 이런 설정에 공감을 보내는 데서 현재에 대한 절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기황후>, 궁중 판타지 사극으로 시청률 1위

극 중에서 권문세가를 대표하는 이인임과 정도전의 치열한 설전이 어록을 양산하며 시청자를 몰입시켰다. 정도전은 “백성은 굶주리는데 권문세가의 창고엔 쌀이 넘쳐난다. 그 쌀을 공평히 나누는 것이 바로 개혁이다”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천명했다. 반면 이인임은 구휼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자는 이성계에게 “그러면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백성들이 궁만 바라본다. 공짜도 반복되면 권리가 된다”며 복지 반대론을 펼친다. 지극히 현재적인 가치의 대립이다.

“정적이 없는 권력은 고인 물과 같소이다. 권세와 부귀영화를 오래 누리고 싶으면 정적을 곁에 두세요”라는 이인임의 대사도 울림이 크다. 극 중에서 권문세가는 신진 사대부와 최영이라는 양대 정적을 모두 실각시키고 독주했을 때 마침내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를 배제하려고만 하는 최근 우리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거지니까, 그래도 밀어붙이니까 사람들이 더 겁을 집어먹지 않겠소이까!” 무고한 사람을 역적으로 몰자 너무 ‘어거지’ 아니냐며 난색을 표시하는 동료에게 이인임이 한 말이다. 이것은 유서 대필 같은 황당한 공안 조작 사건으로 점철됐던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게 한다. 이런 대사 말고도 현대 정치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어록이 넘쳐나 사극 팬을 흥분시켰다.

<기황후> 같은 치정 암투극은 안방극장에 흔했다. 한 거대 집안의 재산을 둘러싸고 음모·배신·복수 등이 난무하는 막장 드라마 구조와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반면 <정도전>류는 드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아저씨’가 볼 만한 사극, 정치를 정면으로 말하는 사극. 그래서 매체와 여론으로부터 특별한 주목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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