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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3. 광해군, 속 좁은 정치 하다 쫓겨나

세종은 자신의 등극 반대한 황희 중용해 큰 업적…정적 포용해야 국가 발전 도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ㅣ 승인 2015.01.29(Thu) 18: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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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는 당 태종 이세민인데, 그는 여러 면에서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닮았다. ‘현무문의 변’이라 불리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자였던 친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에 의해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것처럼 당나라 개국 시조인 고조 이연도 이 난으로 제위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러나 당 태종 재위 기간인 ‘정관(貞觀)의 치(治)’는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분류된다. 형제들을 죽이고 부친을 내쫓은 이세민은 어떻게 중국 최고의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쓴소리가 주특기인 정적(政敵)들을 포용했기 때문이다.

   
KBS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세종과 황희 정승이 정사를 논의하고 있다. ⓒ KBS 제공
세종 업적은 황희 정승의 내정 안정에서 비롯

쓴소리의 대명사였던 위징은 한때 당 태종을 죽이려던 인물이었다. 위징은 태자 이건성을 위해 일했던 참모다. 위징은 태자에게 동생 이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러 번 권고했지만 태자는 주저했다. 그 사이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위징 열전’은 정권을 잡은 태종(이세민)이 위징을 죽이려고 불러서 “네가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위징은 “황태자(이건성)께서 만약 저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태종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솔직함을 높이 사 황제나 재상들의 잘못을 논박하는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했다. 한때 자신을 암살하려던 관중을 중용해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覇者)가 되었던 제(齊) 환공(桓公)이 그랬던 것처럼 태종도 정적을 포용함으로써 큰 업적을 이룩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말 잘 듣는 측근만 중용하다가 패망한 군주는 셀 수 없이 많아도, 정적을 중용해 큰 업적을 남긴 군주를 찾기란 쉽지 않다. 건국 전 상승(常勝)장군이라고도 불렸던 당 태종의 유일한 패배는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연개소문에게 패전한 것인데, 이때 위징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신당서> ‘위징 열전’은 고구려에서 돌아온 당 태종이 크게 탄식하면서 “위징이 만약 살아 있었으면 내가 어찌 이 행차를 했겠는가”라면서 그의 묘지를 다시 수리하고 가족들을 후하게 대접했다고 전한다.

조선에서 정적을 중용해 많은 업적을 남겼던 인물이 세종이다. 세종과 황희가 그런 관계인데, 황희는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려는 뜻을 알고도 세자 폐위를 반대한 인물이었다. 세자 폐위를 반대했다는 것은 곧 세종의 즉위를 반대했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이 태종 18년(1418년) 전 중추(中樞)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하는 사건까지 일으키자 태종은 세자 교체 의사를 대신들에게 알렸다. 대신들은 즉각 폐위를 요청하는 공동상소를 올려 왕의 뜻에 동조했다. 그러나 태종이 이 문제를 먼저 황희에게 상의했을 때 황희는 “세자의 실덕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입니다”(<태종실록> 18년 3월6일)라고 두 번씩이나 양녕대군을 옹호하며 교체에 반대했다.

태종이 황희의 반대 사실을 알리자, 황희가 태종의 눈 밖에 났다고 판단한 대신들과 대간에서는 연일 황희를 성토하고 나섰다. 태종은 황희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고향인 경기도 교하로 쫓아냈다가 다시 전라도 남원으로 내쳤다. 황희의 처형을 주청하는 상소문이 계속 올라오는 와중에 태종은 재위 18년(1418년) 6월,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8월에는 왕위까지 충녕대군(세종)에게 물려주었다. 객관적으로 황희는 끝난 인생이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대간에서는 “즉위 초에 부왕(父王)을 위해서 불충한 자를 베어야 한다”고 황희의 사형을 거듭 주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를 처벌하지 않았다. 세종은 황희를 경시서 제조(京市署 提調)에 임명했다가 가뭄이 든 강원도에 관찰사로 보내 그 능력을 시험했는데, 적극적인 구황(救荒) 정책으로 백성들을 살려내자 의정부 찬성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세종이 황희를 다시 불러들인 것은 부왕인 태종의 뜻이었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태종이 세상을 떠난 재위 4년(1422년) 이후에도 계속 중용한 것은 오로지 세종의 의지였다. 세종은 재위 8년(1426년) 5월에 황희를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때부터 황희는 만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문종 2년(1452년)까지 26년 동안 ‘직업이 정승’이었다. 세종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를 얼마나 중용했는지는 재위 18년(1436년) 4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꾼 데서도 알 수 있다. 태종이 22년 전인 재위 14년(1414년)에 단행했던 육조직계제는 집행 부서인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업무를 보고하는 제도였다. 반면 의정부서사제는 육조에서 의정부에 먼저 보고해서 1차 심의를 받은 후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제도였다.

광해군도 초기엔 연합정권으로 왕권 강화

육조직계제 때는 국왕의 권한이 막강한 반면, 의정부서사제 때는 3정승의 권한이 막강했다. 조선 중·후기 문신 박동량(1569~1635년)이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말한 것처럼 “영의정은, 자리는 높지만 맡은 사무는 없는” 일종의 명예직이기도 했지만, 세종은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면서 “지금부터는 영의정 이하가 함께 논의해 가부를 시행하게 하라”(<세종실록> 18년 4월12일)며 영의정도 정사에 참여하게 했다. 한마디로 세종은 영의정 황희가 있었기 때문에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바꾼 것이었다. <세종실록> 31년 10월5일자에서 황희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진정한 재상이라고 불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세종이 재위 기간 동안 4군6진을 개척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 같은 인물을 중용해서 내정의 안정을 기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즉위 초반도 마찬가지였다. 선조는 계비(繼妃)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내심 세자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의 영수 영의정 유영경이 광해군을 압박했다. 이때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 영수 정인홍이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국가와 신민에게 화를 끼칠 자도 유영경”이라며 유영경을 공격했다. 이에 선조는 정인홍을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고 비난하면서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 보냈다. 그야말로 정인홍과 광해군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는데, 정인홍의 상소 직후 병석의 선조가 사망하면서 광해군이 가까스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목숨 걸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만으로 당파를 꾸려가지 않고 다른 당파도 중용했다. ‘남인(南人)’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고, ‘서인(西人)’ 이항복을 좌의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자 서인이었던 함흥 판관 이귀는 “신과 정인홍이 원래 서로 용납하지 않는 사이라는 것은 국인(國人)들이 다 알고 있다”면서도 “정인홍은 선비(儒)라는 이름이 있고 나이도 70세인데 만 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길에서 죽는다면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라면서 석방을 주청했다. 선조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부왕의 결정을 뒤집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광해군의 짐을 서인인 이귀가 덜어준 것이었다. 광해군의 포용 정치에 서인도 화답한 셈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1월1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신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정치 쇄신 외면으로 국정 동력 크게 떨어져

남인 영상 이원익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 대동법이란 농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세법으로 농토를 다수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반대했지만 농토가 없는 가난한 소민(小民)들은 적극 찬성했던 법안이다. 나아가 광해군 재위 2년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고 그간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양전(量田) 사업도 추진했다. 내치에서 광해군의 주요 업적은 이처럼 여러 당파들을 아우른 연립내각 시기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훗날 광해군은 인목대비 폐모라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면서 스스로 비극을 초래했다. 이를 계기로 다른 모든 당파를 몰아내고 대북 한 당파만을 중용하는 협량(狹量)의 정치로 퇴행한 결과, 이귀가 주도한 인조반정을 맞아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인조반정은 신하들의 불충이자 반역 행위지만 광해군이 집권 초기처럼 다른 당파도 등용하는 포용의 정치를 펼쳤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폐모 사건 이후 단독 정권을 수립한 대북은 서인들 대다수가 가담한 인조반정의 낌새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 즉위 초기 남인과 서인을 모두 포괄하는 연립정권으로 왕권을 극대화했던 광해군은 폐모 사건으로 대북 일당 체제를 구축했으나 왕권은 크게 약화되고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당 태종이나 조선의 세종은 한때 자신의 정적이었던 인물들을 중용해 왕권을 극대화하고 국가도 크게 번성케 했다. 반면 광해군은 폐모 같은 이념 논쟁으로 다당제를 무너뜨리고 대북 일당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가 쿠데타로 쫓겨나고 말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선 때 공약했던 국민대통합과 정치 쇄신 등을 실천하는 것이 사회 안정과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국정의 동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포용은 손해가 아니라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사실을 방기하는 우(愚)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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