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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십자, ‘아로나민’ 삼켜 영양제 보충하나

일동제약에 ‘경영 참여’ 통보…전문가들 “적대적 M&A 수순”

노진섭 기자 ㅣ no@sisapress.com | 승인 2015.02.13(Fri) 18: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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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회복제(아로나민)로 유명한 제약회사 일동제약은 설립 후 가장 피곤한 해를 맞고 있다. 2대 주주인 녹십자에 경영권을 내줄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제약업계와 금융계에서는 녹십자의 일동제약 인수·합병(M&A)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쏟아지고 있다. 한 M&A 전문가는 “녹십자는 경영권 분리, 사업 다각화 등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일동제약 인수가 필요한 시기”라고 분석했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일동제약과 녹십자의 경영권 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녹십자가 보여준 행보는 과거 다른 제약사들의 인수 과정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녹십자가 일동제약에 공을 들인 것은 4년 전부터다. 2011년 녹십자 계열 보험사인 녹십자생명(현재 현대라이프)은 일동제약 지분 7.7%를 사들였다. 이듬해 녹십자생명을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길 때에도 녹십자는 일동제약 지분만큼은 남겼다. 이후 본격적으로 지분 확대에 나섰다. 환인제약이 보유한 일동제약 지분 약 7%를 사들이는 등 지분율을 15%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 시사저널 포토
마땅한 대응 수단 없는 일동제약

위기감을 느낀 일동제약은 2013년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주사 전환을 시도했다. 지분율을 높여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러자 녹십자는 3대 주주인 이호찬씨로부터 일동제약 지분 12%를 매입하는 등 전체 지분율을 29.36%로 높이며 일동제약의 확고한 2대 주주가 됐다. 이 자격으로 지난해 2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에 반대표를 던졌다. 당시 녹십자는 일동제약 지분 10%를 가진 피델리티펀드를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여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 시도를 무력화했다.

녹십자는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변경했다. 경영 참여는 통상 기업 인수전에 나서는 과정으로 여겨지는데 시장에서는 녹십자의 행보를 두고 ‘적대적 M&A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에 대해 조순태 녹십자 부회장은 “적대적 M&A는 아니다”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제약산업은 그러한 (합병)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일동제약의 최대주주인 윤원영 회장 측의 지분율은 32.52%로 녹십자와 3.16%포인트 차이에 불과하다. 특히 지난해 사장으로 승진한 윤 회장의 장남 윤웅섭 사장의 지분은 1.63%다. 녹십자에 의해 오너가의 경영 승계마저 어그러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녹십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인수·합병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1년을 보냈다.

2월6일 녹십자는 일동제약에 이사 선임안을 담은 주주 제안서를 발송했다. 주주 제안은 법인 지분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주주총회에서 논의할 안건을 낼 수 있는 권리다. 이 주주 제안서에는 3월에 임기가 만료되는 일동제약의 감사와 사외이사를 녹십자가 추천하는 사람으로 선임해달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일동제약 경영권에 개입하겠다는 선전포고로 풀이된다. 주주 제안서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일동제약은 3월에 열릴 예정인 주주총회에 이 안건을 상정해야 한다. 주주 제안에 대해 녹십자 관계자는 “일동제약 경영진이 경영을 잘못하고 있으니 주주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며 “그렇다고 이번 조치가 적대적 M&A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일동제약이 잘하는 것과 녹십자가 잘하는 부분을 합쳐서 경영을 잘 이끌어보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임기가 만료되는 이사진은 이정치 대표이사 회장, 이종식 감사, 최영길 사외이사 등 3명이다. 이 가운데 대표이사 회장을 제외한 감사와 사외이사 자리에 ‘녹십자 사람’을 앉히겠다는 것이다. 제약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녹십자가 대표이사 회장 자리까지 차지하면 적대적 M&A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는데, 이는 돈으로 기업을 산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고, 한국적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당장 M&A를 진행하지는 않더라도 현재 녹십자 행보는 일동제약 인수 쪽으로 흐를 것 같다”고 진단했다.

   
녹십자, 이사 선임안 제안…‘경영 참여’ 의지

녹십자는 적대적 M&A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일동제약은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녹십자는 1년 전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을 반대하면서 경영권 방어를 막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저항할 만한 무기가 없는 일동제약은 2월9일 적대적 M&A가 아니라는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입장을 밝혀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녹십자에 전달했다. 일동제약은 그 답변을 받은 후 2월 말쯤 이사회를 열어 주총 일정과 상정 안건을 결정할 계획이다. 일동제약 관계자는 “녹십자의 뚜렷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했고 그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이어서 당장 내놓을 수 있는 회사의 공식 입장은 없다”며 말을 아꼈다.

녹십자가 어떤 대답을 내놓든, 일동제약은 주주총회에서 녹십자와의 표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사 선임안이 통과되면 녹십자는 일동제약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M&A를 자연스럽게 안착시킬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된다. 따라서 녹십자는 지난해처럼 피델리티펀드와 세를 합칠 가능성이 있다. 녹십자 관계자는 “이번 표 대결에서 피델리티펀드가 캐스팅보트(결정권)인데 현재로서는 어느 편에 설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녹십자가 일동제약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한 2012년 주당 1만원도 안 되던 일동제약 주가는 현재 2만원까지 두 배가량 상승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녹십자가 시세 차익을 노리고 투자를 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실제로 녹십자는 2003년 1600억원으로 대신생명을 인수해 녹십자생명보험을 시작하다 2011년 현대차그룹에 2283억원에 팔아 683억원의 이익을 챙겼다. 동아제약 지분 4.2%를 매입하고 이듬해 팔아서 약 200억원의 차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일동제약에 대한 녹십자의 투자는 시세 차익보다는 인수·합병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녹십자 오너 일가를 잘 아는 한 M&A 전문가는 “시세 차익을 노린 투자라고 보기엔 30%라는 지분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며 “녹십자가 1800억원을 들여 캐나다 몬트리올에 혈액제제 공장을 올 상반기에 착공할 예정이어서 여기에 들어갈 돈이 필요한 마당에 타 제약사에 투자해 시세 차익을 기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일동제약 인수를 목적으로 녹십자가 주식을 매집한 것인데, 이는 오너가의 경영권 분리와 사업 다각화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녹십자, 경영권 분리와 사업 다각화 필요

녹십자는 현재 허일섭 회장과 허은철 대표가 이끄는 모양새다. 허일섭 회장은 2009년 사망한 허영섭 회장의 동생이다. 허은철 대표는 고 허영섭 회장의 차남이다. 허 회장은 아내와 자녀를 동원해 녹십자 지분을 약 12% 확보해 조카인 허 대표와 허 대표의 형제들(허성수, 허용준)이 보유한 지분의 2배쯤 된다. 허 회장이 지분율을 내세우고, 허 대표는 경영 정통성을 강조하면 숙부와 조카 사이에 경영권 논쟁이 불거질 수 있다. 허영섭 회장이 작고했을 당시에도 지분 문제로 가족끼리 법정 다툼을 벌인 바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대개 계열사를 분리해 경영권 충돌을 막는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녹십자 자체 계열사는 고만고만해서 분리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고 큰 덩어리가 필요한데 그것이 일동제약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그렇게 되면 두 집안이 큰 잡음 없이 경영권을 나눠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녹십자는 혈액제제와 백신을 만드는 제약사다. 다른 제약사처럼 영양제 따위를 생산하지 않는다. 이런 점은 외국계 제약사에도 매력적인 기업으로 비친다. 한 외국계 대형 제약사 간부는 “한국 제약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제약사는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혈액제제만 취급하는 녹십자”라며 “녹십자가 다른 제약사를 인수해도 겹치는 사업이 없어서 사업 다각화에 좋은 환경을 가진 회사”라고 평가했다.

녹십자가 일동제약을 인수하면 현재 전문의약품 위주의 사업구조는 일반의약품 영역으로 넓어진다. 일반의약품 분야에서 인지도가 높은 일동제약의 브랜드 파워까지 얻을 수 있다. 녹십자는 외형을 키우기 위해 2010년 삼천리제약 인수전에 뛰어들었지만 동아제약에 내준 쓰라린 기억이 있다. 삼천리제약은 항바이러스제 약물의 원료와 중간체 생산, 개발에 집중하는 등 원료분야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에이즈, B형 간염 치료제 등 항바이러스 원료 의약품을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나 로슈 등 다국적 제약사에 납품하는 업체다.

2012년엔 세포치료제 기업 이노셀을 151억원에 인수해 녹십자셀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 회사 주식 가치는 745억원으로 3년도 안 되는 기간에 5배로 뛰었다. 업계 관계자는 “녹십자의 시가 총액은 1조6000억원이 넘고 탄탄한 자본을 확보하고 있어 언제든지 M&A가 가능한 상태”라며 “지난해 매출은 9753억원을 기록해 유한양행에 이어 제약업계 2위를 차지했다. 매출액 4000억원의 일동제약을 인수하면 제약업계 1위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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