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세대의 업보가 젊은 세대를 힘들게 한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11.26 21:31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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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삶의 회한 담은 장편 <해질 무렵> 펴낸 소설가 황석영

황석영 작가가 3년 만에 장편소설 <해질 무렵>을 출간했다. 출판사에서 가수 전인권씨를 초대해 북콘서트를 열었다. 11월11일 저녁 서울 서초역 인근 흰물결아트센터에서 열린 북콘서트의 주최 측은 ‘문학의 거장과 음악의 거장이 만난다’는 안내문을 내걸었다.

소설은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노래는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로 시작한다. 소설의 끝과 노래의 시작이 비슷한 것은 우연인가. 황 작가는 전씨와 무슨 관계이기에 북콘서트를 함께 하게 된 것일까. 궁금증은 황 작가가 <해질 무렵> 집필 과정을 설명하면서 금방 해소시켜줬다.

“소설을 쓰다가 카페에 들른 적이 있다. 마침 전인권의 노래가 나오는데, 가사가 머리를 탁 때리는 거야. 내가 쓰고 있는 내용과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노래가 있었다니…. 그 노래 제목이 ‘사랑한 후에’인데. 너무 묘하게 일치해서 재미있기도 했다. <해질 무렵>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이 소설의 주제곡이라 할 만한….”

ⓒ 시사저널 최준필

‘나는 왜 여기 서 있나’란 물음에 관한 성찰

<해질 무렵>은 삶의 회한(悔恨)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나’라는 물음에 관한 성찰이다. 황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절이 오면서 우리는 진작부터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2년 전 봄 황 작가와 인터뷰했는데, 당시 그는 근대화의 상처가 현실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펴낸 소설 <여울물 소리>는 그런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해질 무렵>은 ‘이전 세대의 업보’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질 무렵>은 성공한 60대 건축가 박민우와 아르바이트로 삶을 영위하는 20대 정우희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전개한다. 박민우는 인생의 해질 무렵에 서서 길 위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돌아보며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본다. 더는 변화할 무엇도, 꿈꿀 무엇도 없을 것 같은 그의 일상에 ‘강아지풀’ 홀씨 하나가 날아든다. 그 작은 씨앗은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산동네 달골, 아스라한 그 시절 가슴 설레게 했던 소녀를 불러오고 달골에서 함께 부대끼던 재명이형, 째깐이, 토막이, 섭섭이형 같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견고하게만 보이던 그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젊은 연극연출가 정우희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산다. 그녀는 음식점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뛰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 무대에 매달린다.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그럴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황혼기에 접어든 이의 회한과 젊은이의 일상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한 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전 세대의 업보가 지금 젊은 세대를 현실적으로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책 내용은 황 작가가 살아온 것처럼 무거워 보이는데, 북콘서트는 그런 내용의 진지함을 독자와의 만남이라는 반가움으로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사회자가 책 내용을 짚어가며 나이 든 작가가 젊은이들에 대한 일상과 생각을 어떻게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냈다.

“내가 자주 가는 커피숍이 있는데 하루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다시 갔더니 거기서 일하는 젊은 친구가 잘 보관해뒀다가 돌려주는 게 아닌가. 고마워서 5만원을 건네 사례를 했는데, 그 뒤부턴 주인 몰래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내놓았다. 자연히 친해졌다. 그 친구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더라.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취합하고, 여러 삶의 떠도는 일화들을 모아 소설에 담을 수 있었다.”

단숨에 읽으며 성찰할 수 있게 경장편으로

황석영씨는 작가 인생 50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전 소설쓰기에서 벗어나 중·단편을 내놓겠다고 했는데, <해질 무렵>이 그가 언급했던 모양새를 보인다. 이 소설은 짧은 경장편이다.

“현대인들은 긴 소설을 느긋하게 못 읽는다. 이를테면 주말 아이들과 캠핑 가서 첫날 실컷 놀고 다음 날 오후 돌아올 정리 다 해놓고 부부가 각자 한 권씩 책을 읽자고 해서 읽을 수 있는 분량이 딱 좋을 것 같다. 서사를 해체하고 압축하면서 100여 장을 과감하게 쳐냈다. <해질 무렵>은 원고지 560장 정도 된다. 독자들이 단숨에 책을 읽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것이다.”

<해질 무렵>에는 중요한 상징으로 강아지풀이 등장한다. 강아지풀은 박민우의 첫사랑인 차순아를 상징하는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우리 이웃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 날 내 집 근처에 누군가 화분을 버렸더라. 화분을 보니 가운데에 어떤 식물이 말라 죽어 있고 그 주위에 강아지풀이 나 있었다. 강아지풀이 어디서 날아와 거기서 자란 것이다. 그걸 보고 소설에 넣게 된 것이다. 강아지풀은 두 주인공 모두에게 차순아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빈민가가 개발돼도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사라져버리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들은 어디론가 밀려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결국 강아지풀을 죽이는 것이나 재개발하는 행위나 별 차이가 없다. 강아지풀은 우리 사회가 회한으로 남긴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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