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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기억 심리부검] 목 졸라 기절시킨 후 각본에 맞춰 자살로 위장

동거녀 “불륜 관계 폭로” 협박에 유부남 ‘가짜 유서’ 남기며 살인

서종한 | 프로파일러 (사이몬프레이저대학 정신건강법 ㅣ . | 승인 2016.04.07(Thu) 19: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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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늦은 가을, 30대 중반의 김현택씨는 직장 근처 클럽에서 20대 중반의 여성 이미경씨를 만났다. 서로 호감을 느낀 그들의 관계는 곧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유부남인 김씨는 부부관계에 불만이 쌓여 있던 차에 거리낌 없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총각 행세를 하며 주중에는 자신의 집에서, 주말에는 이씨의 집에서 동거하며 은밀하게 이중생활을 해나갔다. 그녀는 남자 몰래 임신을 했고 빨리 이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씨는 이 일로 가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관계를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하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김씨는 결혼 생각이 없다며 낙태를 강요했다. 하지만 이씨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 했다. 오히려 갑자기 남자의 태도가 바뀐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씨는 의문을 품은 채 퇴근길에 그를 미행했고, 결국 그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배신감을 느낀 그녀는 김씨에게 부인과 이혼하지 않으면 불륜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 일러스트 임성구


어떻게 자살로 위장할지 미리 준비

이씨는 이혼을 요구하며 자신이 직접 그의 부인을 만나 담판을 지을 것이라고 수시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회사에 전화를 걸고, 점심시간에 직장 앞에서 기다리는 등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견디다 못한 김씨는 그녀의 집에서 이야기를 하자며 저녁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바로 그날 밤,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였고 김씨가 그녀의 목을 졸라 질식시켰다.

김씨는 부엌칼로 그녀의 손목과 옆구리에 상처를 낸 후 목욕 타월을 이용해 화장실 건조대 고리에 그녀를 매달았다. 20여 평의 다세대 주택인 집을 깨끗이 청소한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용했던 세면도구와 옷가지를 깔끔히 정리했다. 그런 후 CCTV가 없는 뒤쪽 계단을 이용해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김씨는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죽일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 자살로 위장(staging)할지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짠 시나리오대로 그는 망설임 없이 살인을 행동으로 옮겼다.

다음 날 회사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진희씨는 출근도 하지 않고 갑자기 연락도 두절된 이씨가 걱정돼 직접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이 없자 불안해진 그녀는 곧바로 112에 신고를 했다. 현장에 과학수사요원과 함께 출동한 필자가 언뜻 봐서는 여느 자살 현장과 비슷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자살 현장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안으로 시건(施鍵) 장치가 돼 있었고 집 안은 깨끗이 정돈돼 있었다.

의심스러운 유서, 말미에 이름·서명까지 남겨

유서도 발견됐고 몸에는 특별한 외상이 없었다. 외부 침입의 흔적이나 금품 도난도 없어 범죄와 연루된 단서는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경험치가 사건을 미궁으로 빠뜨리는 잘못된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건 현장에서 형사가 흔히 겪는 불안한 심리를 줄이기 위해서 곧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치, 곧 휴리스틱(heuristic)에 의존하게 된다.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접근은 바로 자신만의 휴리스틱을 맹신하는 경우다.

현장에는 노트북을 이용해 작성한 한 장의 유서가 안방 화장대 위에 남겨져 있었다. 빽빽이 쓴 유서에는 개인적인 내용과 정보, 통장 번호와 비밀번호, 최근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 세세하게 남겨져 있었다. 여기에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아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언급돼 있었다. 부탁한 사안도 있었다. 자신의 집을 처리해서 부모님께 드릴 것, 나머지 가족에게는 미안하다는 것, 자신을 걱정하지 말고 잘 살라는 것, 그리고 화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다른 사람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고 살고 싶은 의욕이 없고 우울증 때문에 자신의 문제로 자살했음을 수차례 확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이 아닌 나의 우울증 때문에 자살한다’며 변명을 하는 듯한 대목이 여러 번 유서에 강조된 경우는 그렇게 흔치가 않다.

유서 말미에는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서명까지 했다. 마지막 대목은 소설가 공지영의 산문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의 한 대목인 ‘희망은 파도처럼 부서지고 새들처럼 죽어가며 여자처럼 떠난다’를 인용했다. 특이한 점은 자필이 아닌 컴퓨터 워드를 이용해 유서를 남기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문학작품을 인용하는 등 현학적이면서 추상적인 용어가 등장한 점,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로 자살한다는 내용을 강조한 점 등의 특징은 일반적인 유서와는 구별되는 것들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유서를 봐왔지만 워드로 타이핑해서 작성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도 유서 말미에 자신의 이름과 서명까지 남긴 유서는 희귀하다. 분량도 건조체로 몇 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유서는 10포인트 크기의 글씨로 두 장을 채웠으니 상당히 많은 내용이었다. 소설이나 시를 인용한 형태는 지금껏 보지 못한 것이었다. 고차원적인 내용이 상당 부분 존재했고 죽음을 희화(戱化)한 내용도 있어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보통 고유명사는 대명사로 전치되거나 생략되기 쉬운데 이 유서는 가족에게도 계속 이름을 쓰거나 꼬박꼬박 호칭을 드러내 어색함이 존재했다. 유서라는 느낌보다는 변명이나 공식적인 사과문 같은 느낌이었다. 내용 중 우울증 관련 부분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보험 내역과 주변 지인들과의 면담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정신과 진료와 관련 약물을 복용한 적이 없었다. 유서가 지나치게 희화돼 있거나 죽음에 관한 달변 조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면, 그것도 문학작품 구절을 인용해 죽음을 구구절절 설명하려 든다면 이 죽음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죽은 자가 남기는 증언 ‘주저흔’과 ‘생활반응’

이씨의 상처에서 옆구리와 손목 주변에 주저흔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생활반응(vital reaction·특정 충격에 대해 살아 있는 몸이 보이는 반작용)도 뚜렷이 존재하지 않아 생명반응이 없어진 후에 발생한 상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 직전에 미세하게 나타나는 주저흔은 자살의 가능성을 상당 부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주저흔(躊躇痕)이란 생존본능을 완전히 거스르지 못하고 자살 직전 두려움으로 인해 수차례 특정 부위에 자해 흔적을 남긴 것을 말한다. 주저흔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상처 주위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1㎝ 크기로 송곳에 찔린 듯한 상처가 수십 개에서 수백 개까지 일정한 패턴을 그리며 남기도 한다.

옆구리와 손목 상처의 깊이와 크기를 볼 때 상당량의 혈흔이 피해자가 목을 맨 화장실, 칼이 발견된 거실, 그리고 이동한 경로에서 발견돼야 하는데 비산(飛散)된 혈액의 양이 적어 살아 있는 동안 발생한 상처라기보다는 생활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낸 상처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심리부검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일반적으로 이전에 자해 혹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없다면 자살 과정에서 과도하게 파괴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다. 이중·삼중의 중복적인 자살 방법을 이용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이야기다.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이번 사례처럼 부엌칼을 이용해 상처를 내고 목욕탕에 있던 수건으로 목을 매는 식의 과도한 방식을 택한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자살 의도와 치명성 간에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증언과 일기장에 그녀가 쓴 글은 크게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첫째는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에 대한 불신과 원망, 둘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스트레스와 불안, 걱정과 관련된 어구가 많긴 했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이 그녀를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단절시키거나 소외시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친구들도 그녀와 꾸준히 접촉하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했고, 부모도 그녀와 적절한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해 시도, 죽고 싶다 등의 직간접적인 표현, 자살과 관련된 검색, 개인 신변 정리, 정신과적 증상의 존재와 같은 자살과 연결 지을 만한 특별한 징후도, 행동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사망자가 자살에 이를 만한 충분한 의지(suicide intention)를 가졌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시신에서 나타나는 비전형적인 자살 형태, 즉 혈액의 양이 너무 적다거나 당시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이 부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가 있는 점 등이 나타났다. 또 독특한 유서의 형태는 조작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유가족과 회사 동료들은 그녀가 최근까지 긍정적으로 생활했으며 그 예로 여행을 계획한 점을 들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술로 보였다. 필자는 심리부검 보고서를 통해 자살이 아닌 타살의 가능성을 강하게 제시하면서 추가적인 보완 수사가 뒤따라야 한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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