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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평양 Insight] “자식 위해서라면…” 북한에 부는 ‘유학형 탈북’ 바람

수학 영재 리정열 탈북·망명 스토리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3.07(Tue) 15:00:00 | 14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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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공관 운용과 공작활동에서 ‘워크 인(walk-in)’이란 용어는 적대국가의 정보요원이나 국민이 망명 요청 등을 위해 문을 두드리는 상황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북한의 외교관이나 대표부 요원, 탈북자 등이 한국행을 요청하기 위해 들이닥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북한 측에 ‘납치 주장’ 같은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하는 데다 워낙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신속한 판단력과 대처를 필요로 한다. 자칫 어리숙한 대응을 하다가는 상대방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고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등 국익에도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지난해 7월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태영호 북한 공사의 탈북·망명은 대어급(大魚級) 워크 인 사태라 할 수 있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논리나 주장을 서방세계에 설파하는 역할을 맡았던 태 공사는 부대사급 고위 외교관이었다. 게다가 부인과 두 아들을 동반한 한국행 결행이었다. 2015년 5월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의 런던 방문 시 밀착수행과 통역을 맡았던 인물이란 점에서도 관심을 끌 만했다. 김정은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의 망명은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했고, 여진(餘震)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당시 태영호 망명 사태의 그늘에 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한국행을 이룬 18살 북한 소년이 있었다. 지난해 7월 홍콩에 체류하던 중 탈북·망명한 리정열군이다. 리군은 당시 현지에서 열린 제57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다. 같은 달 6일부터 16일까지 홍콩과학기술대에서 열린 행사에는 북한 측 남학생 6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종합점수 168점으로 6위의 성적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7월 제57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폐막식에 참석한 리정열군, 원 안의 두 명 중 한 명이 리정열군이다. © TV조선 캡쳐


리정열 외에도 소리 소문 없는 한국행 줄이어

 

문제는 이 가운데 리정열군이 대열을 벗어나 한국행에 나서면서 벌어졌다. 대회 폐막 다음 날인 17일 오전 리군은 주룽(九龍)반도에 있는 홍콩과기대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는 “홍콩 국제공항으로 빨리 가달라”고 외쳤다. 그런데 리군에게는 탈북이나 한국행 망명을 위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여권도 없는 데다 도움을 줄 사람이나 연락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공항으로 가면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한국행을 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공항청사에 도착한 리정열군은 한글이 함께 표기된 대한항공 발권 카운터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북한 사람이다.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곧이어 항공사 측 현지 책임자가 뛰어왔고, 한국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리군을 바꿔줬다. 하지만 총영사관 관계자는 현장에 나오는 대신 리군에게 “택시를 이용해 다시 대한민국 총영사관으로 들어오라”고 알려줬다. 탈북 과정 초기부터 우리 해외공관이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게 외교 당국의 설명이다.

 

리군은 영사관에 진입한 뒤 망명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80여 일간의 기다림 끝에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리군은 영사관 내 숙소에서 지냈는데, 처음 한 달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사관 측이 마련해 준 컴퓨터 게임기와 러닝머신 등을 벗 삼아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리군의 탈북과 한국행 과정을 보도한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최근호의 전언이다. 리군은 “공항에서 다시 택시로 한국 총영사관으로 향하던 40분이 인생에서 가장 길고 두려운 여정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한국 대학 원해…일부는 서구 유학 

 

리군은 북한뿐 아니라 아시아 무대에서 수학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는 2014년부터 3년 연속 은메달을 땄다. 국제무대를 경험하면서 리군은 북한 체제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강원도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휴전선이 멀지 않아 한국의 TV나 라디오가 잡혔다. 한국 사회에 대한 동경도 커갔다. 홍콩 대회 참가를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리군은 아버지에게 탈북 결심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학교 수학교사인 아버지는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우리 걱정은 말라”며 200달러를 손에 쥐여줬다는 것이다. 탈북자 가족에게 닥쳐올 참혹한 삶을 알면서도 아들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등을 떠밀어준 것이다.

 

정보 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들어 리정열군과 같은 수학·과학 등 이공계 분야 영재들의 탈북과 한국행이 늘고 있는 추세다. 대개 부모를 따라 해외 국제학교 등을 다니거나 국제 경진대회 참가차 외국에 나왔다가 이탈한 경우다. 북한 체제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해외에서 유학 중에 서울행 꿈을 이루는 사례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아들·딸이 먼저 한국 공관에 망명을 요청한 뒤 이를 찾아 나섰던 부모까지 합류하는 경우도 나타난다”고 귀띔했다. 처음엔 납치라고 생각했지만 자식들의 뜻이 강하다는 걸 알고 함께 짐을 싼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일부 특권층뿐 아니라 지방이나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노동당과 군부의 지역 고위 간부나 돈을 많이 벌어들인 ‘돈주’(신흥부유층) 세력의 경우 자녀들을 서울에 유학 보내듯이 탈북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상당한 돈을 들여 지역 관리 책임자를 매수하고, 중국 쪽에 내보낸 뒤에는 브로커까지 붙여 안전하게 한국행을 성사시키도록 하는 방식이다. 고위 탈북 인사는 “일부 탈북 대학생의 경우 북한의 부모로부터 돈을 송금받거나, 심지어 방학 기간에 중국으로 나가 북·중 변경지역에서 가족과 만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온 영재 학생이나 엘리트 청년들은 대개 서울에 있는 대학의 관련 학과를 선택한다고 한다. 일부 해외유학을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신변위협 등의 부담이 따른다는 것이다. 리정열군의 경우 3월 신학기부터 한국의 대학에 입학해 수학공부를 계속할 것으로 전해졌다.

 

태영호 전 북한 공사도 아들이 서울 소재 대학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태 전 공사의 맏아들은 런던의 한 대학에서 공중보건경제학 학위를 받았으며, 덴마크에서 태어난 작은아들은 명문으로 알려진 임페리얼 칼리지 진학을 앞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무대를 경험한 이들 예비 엘리트들에게 북한 체제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은 김정은 체제를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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