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 ‘제2 도약’
  • 김은남·차형석 기자 ()
  • 승인 2004.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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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석을 얻어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총선 약진의 기세를 몰아 ‘대권’을 향한 4단계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픕니다!” 선거 개표 방송이 한참 진행되던 지난 4월15일 밤 9시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 겸 선대본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 여의도 민주노동당 당사 앞에 모여 있던 당원 100여 명은 이 말을 듣고 ‘와~’ 환호성을 내질렀다.

격세지감이었다. 2000년 창당 이후 민주노동당은 의석을 단 하나라도 얻는 데 목을 매고 있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광복 이후 늘 그랬다. 4·19 직후 국회의원 7명을 배출한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이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게 무너진 뒤 한국의 진보 정당은 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상자 기사 참조).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의 이번 원내 진출은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선거 직후 당사 앞에 나붙은 플래카드 문구대로 진보 정당은 ‘50년 전 빼앗긴 지갑을 드디어 되찾았다.’ 지난 4월6일 학자 3백여 명과 함께 ‘교수 지원단’ 이름으로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을 발표했던 안병욱 교수(가톨릭대·사학)는 선거 당일 민주노동당 당사를 찾아 “역사의 맹목적 금기를 털어버리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마련됐다”라고 감격했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안팎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데 따른 성과물이기도 했다. 색깔론·지역주의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치 체제를 열망했다. 물갈이를 넘어 판갈이가 필요하다는 이른바 판갈이론은 선거 기간에 유권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자아냈다. 나아가 민주노동당은 헌법 소원을 통해 스스로 얻어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 ‘하늘이 스스로 도운 자를 도운’ 격이었다. 이번 총선에서 새로 도입된 이 제도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외에 비례대표 8석(정당 지지율 13.0%)을 확보했다.

외부 조건 못지 않게 내부 역량 또한 성숙했다. 4년 전 민주노동당이 후보를 낸 지역구는 21곳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후보를 낸 지역구는 무려 1백23곳이었다. 공약 또한 현실적으로 가다듬었다. ‘강령을 되풀이해 선언하는 수준’이었던 4년 전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공약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법령 개정 및 제정 계획, 재정 충당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시민·사회 단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민주노동당이 이번 총선에서 내건 공약은 크게 네 가지. △조세 혁명·복지 혁명·완전고용 실현 △자주화·반전평화·한반도 평화 실현 △식량주권 수호·환경친화적 삶 실현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였다. 이를 뭉뚱그린 간명한 슬로건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은 총선 기간에 유권자의 감성을 파고들었다.
‘촌철살인 어록’으로 유명한 노회찬 사무총장의 대중적 인기도 동반 상승 작용을 했다. 선거 당일 당사 한구석에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청년 10여 명은 스스로를 ‘노사모’라고 소개했다. 열린우리당도 아닌 민주노동당에 노사모가 출현했다? 알고본즉 어리둥절해할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노회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름하여 ‘리얼 노사모’ 회원들이었다. 대구에서 상경했다는 ‘디시인사이드’ 회원 4명도 이날 밤 늦게 당사를 찾았다. 인터넷 공간에 ‘폐인 신드롬’을 퍼뜨린 사이트 회원들답게 이들은 “좌장님, 축하합니다”라며 노 총장에게 큰절을 하는 엽기 행동으로 주변의 눈길을 끌었다(‘좌장’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를 가리키는 네티즌들의 용어이다).

언론의 취재 경쟁 또한 민주노동당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케 했다. 선거 다음날 기자회견을 갖던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우리가 원내 정당이 된 게 실감난다”라고 했다. 회견문 낭독 후 보충 질문이 없어 흐지부지 회견이 끝나곤 하던 과거와 달리 기자들의 질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이 날 권대표는 20분 간격으로 인터뷰 18개를 소화해야 했다. 2003년 한 해 KBS <9시 뉴스>에 민주노동당이 등장한 것이 아홉 번이니, 그 두 배에 달하는 인터뷰를 권대표가 이 날 하루 해치운 것이다.

이러니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기가 뻗칠 노릇이다. 선거 전 민주노동당 실무자들은 ‘우리가 정당 기호 12번을 얻은 것은 신의 뜻’이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12번을 찍으면 일 년 12달이 행복해집니다’라는 선거 카피도 기가 막힐 뿐더러 12라는 숫자에는 자신들의 집권 청사진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5백만 표 이상을 획득해 정당 지지율을 20%로 끌어올리고 △2008년 총선에서 80석 이상을 확보해 명실상부한 제1 야당으로 발돋움한 다음 △2012년 대선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4단계 집권 프로젝트이다. 이번에 정당 지지율 13.0%를 얻음으로써 민주노동당은 1단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런 추세라면 브라질처럼 노동자당이 집권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민주노동당은 낙관하고 있다(41쪽 상자 기사 참조). 단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이 ‘룰라의 신화’를 재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일단 17대 국회가 민주노동당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험장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은 역사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4월17일 한국정치연구회가 주최한 ‘총선 평가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서복경 국회입법조사관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함으로써 한국의 정당 시스템 자체가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지적했다.

숫자로만 따지자면 민주노동당은 10석짜리 미니 정당에 불과하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20석 이상인 원내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5석 이상으로 완화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넓게 보면 원내 교섭단체 구성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서복경씨에 따르면, 진보 정당의 원내 진입은 기존 정당의 정치적 포지션 및 의제(아젠다)를 교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1983년 연방 의회에 처음 진출한 독일 녹색당이 그랬다. 녹색당 의석은 비록 17석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원내 진출 이후 기성 정당은 너나없이 환경 문제를 중심 의제로 설정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이 새롭게 제기하는 의제에 기존 정당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민주노동당이 ‘꽃놀이패’를 쥐게 되는 셈이다.

17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정신적 야당’의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다. 16대 때는 열린우리당이 ‘정신적 여당’을 자임하더니 이번에는 정신적 야당이 출현하는 셈이다. “차떼기 부패 세력으로서 반성할 줄 모르는 한나라당은 여당에 개혁을 촉구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비록 의석 수로는 제2 야당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우리가 제1 야당이 되겠다”라고 노회찬 사무총장은 선언했다.

민주노동당이 공언한 대로 실현만 된다면 17대 국회에는 새로운 의정 문화가 꽃필지도 모른다. 일단 민주노동당 당선자 전원은 연간 1억원이 넘는 국회의원 세비를 당에 일괄 반납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이 중 노동자 평균 월 급여에 해당하는 1백80만원을 의원활동비로 받고, 나머지는 정책개발비로 돌린다는 것이다. 지나친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당직과 공직은 겸직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이 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을 맡는 것은 금지한다는 것이다(단 당 대표나 사무총장에 한해 겸직을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최근 당내에서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의정 활동을 지원할 정책보좌관 역시 의원 개인이 두는 것이 아니라 당이 집단으로 파견한다. 이들 보좌관이 의원 개개인에 대한 내부 감시자 역할을 맡는다면, 일반인과 당원으로 이루어진 의정감시단은 외부 감시자 역할을 맡는다. 한 예로 단병호 당선자 사무장인 박용진씨는 “단병호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양 부류로 의정감시단을 꾸리겠다”라고 밝혔다. 이들 의정감시단은 사안 별로 의원 입장을 묻고,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기성 정당과 차별화하는 것만이 민주노동당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집권을 꿈꾼다면 무엇보다 수권 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다. 민주노동당의 지지 기반은 아직 취약하다. 이번 선거에서 얻은 정당 지지율 13.0%를 민주노동당의 지지 기반으로 곧바로 등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선거 막바지 열린우리당이 위기론을 확산시키자 노회찬 사무총장은 “(탄핵 덕분에) 열린우리당은 길 가다 100만원 든 지갑을 주운 셈이다. 그런데 횡재를 고마워하기는커녕 그 중 20만 원을 소매치기 당했다고 경찰서 앞에서 지금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말마따나 액수에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지갑을 줍는 행운은 민주노동당에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올 초까지만 해도 5~6%대를 유지하던 지지율이 두 배 넘게 치솟은 것은 일종의 반사 이익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텔레비전 토론에 참여한 한 유권자는 ‘벤처에 투자하는 심정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노라고 밝혔다.
실제로 탄핵 정국 이후 심해진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은 민주노동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열린우리당의 ‘헛발질’ 또한 민주노동당에 도움이 되었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를 보면, 선거운동 기간인 4월1~13일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교차하는 추세였다. 곧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42.7%에서 36.3%로 6.4% 포인트 하락하는 동안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5.2%에서 12.0%로 7.2% 포인트 상승했다.

이를 어떻게 안정된 지지층으로 묶어 내느냐가 민주노동당의 당면 과제이다. 물갈이연대가 주최한 총선 평가 토론회에서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사회학)는 “이번 총선에서도 다시금 확인됐듯 서울 강남 지역이 투철한 계급 의식을 갖고 자기네 계급적 이해에 따라 명백한 계급 투표를 하고 있는 데 반해 노동자·서민층은 오히려 계급적 이해와는 거리가 먼 보수적인 투표 행태를 보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들을 지지 기반으로 묶어내지 못할 경우 민주노동당이 오히려 제도 정치의 한계에 함몰될 수도 있다고 조교수는 전망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 또한 “기성 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민주노동당을 찍었던 지지층의 경우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정파간 다툼이 외부로 노출되거나 소속 의원이 말실수 내지 개인적인 색깔 드러내기로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 민주노동당은 보수 세력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당 내부의 복잡한 세력 관계는 민주노동당의 앞날을 예측 불허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이다(상자 기사 참조). 특히 진보 정당이 원내에 진출하게 되면 중도 정당과의 연합·제휴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게 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민주노동당 장석준 기획부장은 지적한다. 열린우리당과 연합·제휴할 수준을 놓고 고민하는 민주노동당 또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당 내부에서는 어설프게 손잡을 것 없이 열린우리당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도 만만치 않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17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의 성공 여부는 앞으로 한국 정치 체제가 미국식으로 갈지 유럽식으로 갈지를 결정할 중대한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만에 하나, 민주노동당이 유권자의 지지를 다시 얻는 데 실패하면 한국 정당 체제는 수구 보수당(공화당)과 온건 보수당(민주당)이 경쟁하는 미국식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에 반해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적응에 성공할 경우 18대 국회에서는 유럽처럼 노동뿐 아니라 환경·여성 등을 대표하는 다양한 세력이 대거 입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민주노동당은 2012년 집권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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