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 사단, '醜風' 낙엽 되는가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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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현 사건 재수사 급가속…
"이번이 마지막 기회" 정권 실세 등 정치권으로 초점 이동
진승현 사건 수사의 종착점은 누구인가? 지지부진하던 진승현 사건 재수사가 법무부 신광옥 전 차관과 국정원 김은성 전 차장을 소환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구속된 사람의 면면을 놓고 볼 때 이번 수사의 타깃은 동교동계가 될 확률이 높다. 집권 말기 조직을 살리려는 검찰과 그 칼날을 상대방으로 향하게 하려는 정치권의 치열한 머리싸움을 추적했다.


검찰의 칼끝이 여의도를 겨누고 있다. 진승현씨 사건 재수사가 시작되던 11월 말 정계에 떠돌던, '최종 목표물은 정치권이다'라는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는 셈이다. 각종 게이트를 축소 수사로 일관하던 검찰이 이번 수사에 적극 나서면서 정치권에 찬바람이 몰아닥치고 있다.




애초 검찰은 이번 수사가 별 것 아니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일부 언론이 제기했던, 진씨의 로비스트 김재환씨가 국정원 정성홍 경제과장과 민주당 김방림 의원에게 금품을 주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수사의 열쇠를 쥔 김재환씨가 잠적해 이번 수사는 아예 지지부진한 듯 보였다.


그런데 12월 초부터 검찰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찰은 잠적한 김재환씨를 앉아서 기다리는 대신 제3의 로비스트라고 불리던 민주당 교육특별위원회 최택곤 부위원장(57·비상근)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최씨는 지난해 수사 때도 이름 정도는 거론되었으나 주가 조작과 불법 대출 혐의를 입증하는 데 바빴던 당시 수사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현 수사팀인 서울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박영관)는 최씨에게 1억5천만원+알파를 로비 자금으로 주었다는 진씨의 진술을 확보했다. 수사팀은 최씨를 12월10일 이후 소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12월11일 〈중앙일보〉가 법무부 신광옥 차관이 지난해 5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을 때 진승현씨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보도가 나간 후 신차관은 이를 극구 부인했고 〈중앙일보〉에 10억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다음날 언론은 일제히 신차관에게 돈을 전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최택곤씨라고 보도했다. 보도 후 최택곤씨는 잠적했고, 진승현씨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신차관은 '만난 기억이 없다'며 말을 바꾸었다.


'검-검 갈등설' 등 음모론도 나돌아


뒤통수를 맞은 서울지검 수사팀은 황당했다. 수사팀 관계자는 누군가 수사를 방해하려는 의도로 수사 정보를 언론에 흘린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언론이 수사 대상을 찍어서 검찰로 끌고 간 셈이었기 때문이다. 수사에는 순서가 있는데 누군가에 의해 그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검찰은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이 정보를 흘리고 있지 않는지 의심했다. 게다가 수사 대상이 검찰의 상부층인 현역 법무부 차관이어서 수사팀은 난감해 했다. 브리핑 자리에서 기자들이 신차관에 대한 질문을 퍼부어도 수사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신차관 수뢰 사실에 대해 말을 아끼던 수사팀은 기자들에게 신중하게 써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언론에 신중해 달라고 당부했던 검찰은 오히려 고위 간부인 신광옥 전 차관에 대한 수사를 강도 높게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이처럼 자기 식구에 대한 수사나 감찰에 열을 올리는 것은 드문 일이다. 검찰은 자진 출두한 최택곤씨를 12월15일 구속하고 신차관에게 돈을 주었는지 강하게 추궁했다. 최씨는 신차관에게 2백만∼3백만 원씩 여러 차례 돈을 건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가 출두하기 전에 검찰이 신차관의 계좌를 추적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신차관은 사표를 내기 직전인 12월14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내 친인척 계좌를 뒤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광옥 전 차관에 대한 수사가 '세게'진행되자 검찰 안팎에서는 음모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현재 가장 널리 유포된 음모론은 수뇌부끼리 반목하는 바람에 수사 기밀이 언론에 샜다는 검-검 갈등설이다. 여기서 수뇌부란 신승남 검찰총장과 신광옥 전 차관을 가리킨다. 이들의 악연은 대검 차장 자리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신차관이 계속 대검 차장 자리를 원했으나 신승남 총장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검찰 내부에서는 신차관이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이던 지난 6월 검찰 정기 인사 때 총장 자리를 노렸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래서 신총장측이 진승현씨가 신광옥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자마자 언론에 이를 흘렸다는 음모론이 나온 것이다.


신 전 차관 수뢰 의혹이 검찰 내부 갈등 때문에 불거졌다는 얘기는 검사들은 물론 여당 관계자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신차관에게 불똥이 튄 것은 정치권과 무관하다. 검찰 내부 갈등이 주요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내부 사정이야 어떻든 검찰은 신광옥씨에 대한 수사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난 9월 이용호 게이트 수사 때부터 검찰은 권력형 비리를 축소 수사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진 검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총장이 탄핵 소추 대상이 되는 불명예를 당했다. 위기에 몰린 검찰이 검찰 수뇌부인 신광옥 차관 수뢰 의혹을 읍참마속하는 심정으로 수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신씨가 현 검찰 지도부의 희생양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신광옥씨 수사로 검찰은 얻는 것이 적지 않다. 검찰은 신씨를 침으로써 정치권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검찰 출신인 한 변호사는 "지금까지 검찰은 언론과 야당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던 검찰은 신씨 사건을 계기로 그 감옥에서 나와 언론과 정치권보다 우위에 설 기회를 잡았다"라고 분석했다. 즉 검찰이 법무부 차관 비리라는 치부를 기꺼이 도려냄으로써 운신할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또 총장 취임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느라고 정신 없던 검찰이 숨고르기를 하며 집권 말기를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도 큰 수확이다. '신총장 표정이 요즘 밝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증명하듯이 검찰은 진승현 사건 수사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우선 국정원 김은성 전 차장 소환을 서두르고 있다. 그 동안 검찰은 김씨 소환을 검토한 적이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심지어 검찰은 지금까지 김씨가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으로부터 천만원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랬던 검찰이 김씨를 소환해 진승현씨의 정·관계 로비에 개입했는지를 조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김씨는 진씨의 핵심 로비스트로 알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검찰은 잠적한 김재환씨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민주당 김방림 의원을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방림 의원은 김재환씨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현금 5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김방림 의원은 권력 실세라고 할 수 있는 권노갑 전 고문 계파 의원으로서 금융감독원을 담당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이다. 검찰이 김재환씨의 신병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의원을 소환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현 권력 실세를 건드리겠다는 선전 포고와 다름없다.


권노갑 사단 '醜風' 낙엽 되는가


그동안 진승현 리스트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던 검찰은 '메모 형식이라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진씨는 지난해 초 열린금고 불법 대출과 리젠트증권 주가 조작 등으로 금감원에 고발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모면하려고 전방위 로비를 펼쳤다. 이때 진승현씨는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는지 적어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진승현 리스트다. 이 리스트는 지난해 수사 때에도 존재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설로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검찰 수사 결과 민주당 김방림 의원이 5천만원을 받았다는 진술이 나왔고, 국정원 정성홍 과장이 진씨로부터 1억4천6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거기다 최근에는 민주당 동대문을지구당 허인회 위원장이 4·13 총선 때 정치 자금으로 진씨에게서 5천만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이 돈은 영수증 처리가 된 합법적인 정치 자금이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진씨의 돈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됨으로써 진승현 리스트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 가고 있다.


이 리스트는 진씨가 구명 로비에 실패해 결국 검찰에 수배되자 김재환씨 등 측근 인사들이 이른바 대책회의를 열고 만약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리스트말고도 진씨 로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정성홍 전 국정원 경제과장과 김은성 전 차장이 만든 것이 있다고 알려졌다. 두 가지 리스트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에 따르면, 진씨가 만든 최초 리스트에는 여당 의원만 30명이, 김씨가 만든 리스트에는 야당 의원을 포함해 50명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미 리스트 내용 일부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특히 금감원을 담당하는 정무위원회나 정보통신부를 맡는 정보통신위원회 의원이 명단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은 일단 자기 당 소속 의원은 진씨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며 대여 공세를 강화하고 있지만, 진승현씨가 구속된 후 그를 접견했던 한 법조계 인사는 "진씨는 '내가 돈을 준 야당 정무위 의원 이름을 불면 검찰이 날 풀어줄까요?'라고 물어본 일이 있다"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진씨 로비의 주요 타깃은 역시 동교동계 실세라는 것이 정설이다. 동교동계야말로 구속을 눈앞에 둔 진씨를 구해줄 힘이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거기다 진씨 로비의 구심 역할을 하던 김은성 전 차장이 동교동계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라는 점도 동교동계 로비설에 무게를 얹는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번 검찰 수사의 종착점은 동교동계의 맏형인 권노갑 전 고문과 김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일 의원이 될 수밖에 없다.




진승현 게이트에 휘말려 가장 큰 피해를 본 쪽은 역시 '권노갑 사단'이다. 국정원 김은성 전2차장·정성홍 전 경제과장·김방림 의원·최택곤씨가 모두 권노갑 계열로 분류되거나, 예전에 두터운 인간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다. 권 전 고문은 이들과의 관계 때문에 끊임 없이 '현정권 실세 K'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며 진승현 게이트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김홍일 의원도 정성홍 전 경제과장이 '조폭과 어울리는 것을 보았다'고 폭로하는 바람에 한바탕 곤욕을 치른 데 이어, 이번에도 최택곤씨가 그의 이름이 박힌 돈봉투를 검찰 관계자들에게 돌렸다는 얘기가 흘러나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검찰, 정치인 계좌 추적 나설 듯


이와 관련해 현재 정가에서는 음모설이 파다하다. 여권 내부의 권력 암투설이다. 즉 여권 일부 세력이 진승현 사건을 계기로 정·관계에 뿌리를 깊이 내린 권노갑 사단을 제거하려는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양측이 물밑에서 치고 받다 보니 여러 가지 감추어졌던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음모설은 차기 대권 구도와 맞물리면서 꽤 설득력 있게 정가에 유포되고 있다. 이 음모설이 설득력을 갖는 까닭은, 현재 이 사건과 관련해 세상을 놀라게 만든 거의 모든 새로운 사실들은 야권이나 언론의 취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권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물론 권 전고문측은 벌써 여러 경로로 "나는 어떤 비리에도 연루된 바 없다"라고 밝혔다. 권노갑 전 고문의 측근인 민주당 이훈평 의원은 "권 전고문은 지금 물러나고 싶어도 마치 떳떳하지 못해 물러나는 것처럼 비칠까 봐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다"라고 말한다.


어찌되었든 검찰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검사들 간에도 이번이 조직을 살릴 마지막 기회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검찰은 진씨에게 여러 의원이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치인들의 계좌를 합법적으로 뒤질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올해 초 과거 안기부가 1996년 총선자금을 당시 여권에 지원한 사건을 수사하며 야당 정치인의 계좌를 뒤진 적이 있다. 그런 검찰이 이번에는 여당 정치인의 계좌를 뒤지는 것이다.


추적 결과 검찰이 어떤 정치인을 호명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음모설에 무게를 싣지 않더라도 여권뿐만 아니라 야권도 긴장해야 할 만큼 검찰이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검찰로서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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