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재벌 ‘샅바 싸움’
  • 장영희·안은주 기자 ()
  • 승인 2003.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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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와 재벌 사이에 먹구름이 몰려 있다. 언론의 보도 경쟁과 일부 인수위원의 사려 깊지 못 한 처신이 양측의 갈등을 부추긴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재벌과 2월25일 출범할 노무현 정권과의 기싸움이 대단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구성된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특히 재벌 정책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고 있다. 아직 공약 수준인 재벌 관련 정책들과 이에 대한 재계의 반응이 신문 머리 기사를 장식하면서 인수위가 재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듯한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1월7일 인수위 임채정 위원장이 1월3∼7일 각 신문에 실린 인수위 관련 머리 기사 19개 가운데 인수위에서 검토하거나 논의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며 언론의 자제를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임위원장이 밝혔듯이 인수위 전체회의에서 발의된 안건을 의제로 채택하고 토론 후 의결해 노무현 당선자에게 보고된 것은 단 한건도 없다. 인수위는 이제 겨우 분과 별로 정부 부처의 보고를 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인수위가 재벌 관련 대선 공약을 밀어붙이려고 벼르고 있으며, 이에 재계가 반발하고 있고,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김대중 정부와도 마찰을 빚고 있다는 보도들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삼성그룹이 타깃이라는 설마저 터져나왔다. 1월7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인수위가 추진하려는 금융 계열사 분리 청구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같은 재벌 정책이 삼성그룹을 겨냥하고 있다고 못박았다.






“재벌, 보수 언론 통해 인수위 흔들기 나섰다”



인수위 활동 초반에 왜 이런 혼란이 야기되는 것일까. 우선 2백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한꺼번에 인수위에 출입하면서 보도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권력 이동에 민감한 언론 생리상 인수위에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고, 한 언론사당 3∼7명까지 투입된 기자들이 인수위원 개인 의견을 마치 결정된 정책인 양 선정적으로 보도하거나 아예 공약을 확대 해석해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인수위원들의 신중하지 못한 처신을 지적하는 얘기도 나온다. 가령 1월2일 경제2분과 김대환 간사의 구조조정본부 해체 검토 발언이 좋은 예다.



언론사 간의 보도 경쟁과 일부 인수위원의 사려 깊지 않은 처신이 혼란을 부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학계와 인수위 일각에서는 이것은 깃털일 뿐 이른바 보수 언론을 통한 재벌의 인수위 흔들기가 몸통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말 인수위원들이 인선되자 언론들은 일제히 경제 1·2분과의 진용이 강성 재벌개혁론자 일색으로 짜였다며, 이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담았다. 심지어 일부 위원은 재벌해체론을 주장했던 학자여서 새 정부의 재벌 정책이 결국 재벌 해체로 치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삼성 타깃설도 이런 맥락에서 불거졌다.



인수위 사정에 밝은 한 경제학자는 “재벌들은 보수 언론을 움직여 재벌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반재벌론자로 매도하고 두들겨패 왔다. 좋은 예가 김대중 정부 초기 경제·정책기획 수석을 맡았던 김태동 교수였다”라며 또다시 재벌의 교묘한 인수위원 흔들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도 이런 기류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기업들은 인수위 때 쳐야지 새 정부가 뜨면 어려워진다고 보고 있다. 백면서생인 교수들이어서 현실을 모른다는 말을 흘리는 것도 인수위 힘빼기의 일환이다”라고 말했다.



인수위 인선 직후 보였던 재계의 행보도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12월31일 노당선자와 경제5단체장과의 회동에서 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은 출자총액제한 제도 폐지를 요청했다. 노당선자가 박회장의 요청을 들어줄 리 만무했지만 박회장은 첫 만남 자리에서부터 노당선자의 공약에 시비를 걸었다.



전경련 손병두 부회장도 1월4일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노당선자의 재벌 관련 공약의 부적절성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외환 위기 이후 경영 투명성과 지배 구조가 크게 개선되어 과거 나빴던 재벌 이미지가 없어졌는데도 재벌 개혁의 기치를 높게 내거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었다. 손부회장은 특히 ‘대기업과 재벌은 다르다’는 노당선자의 분리 정책은 비현실적이라고 반박했다.






언론을 통한 이런 재계의 움직임에 노당선자와 인수위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노당선자는 1월7일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을 통해 적극 해명을 지시했다. 노당선자는 무슨 급진적 조처로 혁명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언론이 재계와 싸움을 붙이고 있는 데 대해 불쾌감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다음날인 8일 인수위는 인수위원 가운데 재계와 ‘말이 통하는 유일한 인물’로 꼽힌다는 김진표 부위원장을 통해 아예 새 정부의 재벌 정책이 삼성이라는 특정 재벌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재벌 정책을 장기적·점진적·자율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이른바 세 가지 원칙론도 발표했다.
당선자 진영이나 인수위는 보수 언론과 재벌이 합작해 교묘히 흔들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재계와 대립각을 세우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1월7일 발표된 10대 국정 과제에서도 재벌 개혁이라는 표현을 빼고 경제 시스템 개혁이라는 포괄적인 말을 썼다.



‘사회주의’ 발언 엎친 데 덮쳐



재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이런 인수위의 노력에 전경련 김석중 상무의 사회주의 발언은 찬물을 끼얹었다. 김상무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그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수위의 목표가 사회주의이며, 그것에 대해 재계가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인수위측은 전경련에 발언의 진의와 근거, 발언 경위 등 진상을 파악하라고 강력히 요구했고, 1월13일 전경련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김각중 회장 명의로 사과 공문을 임채정 위원장에게 보냄으로써 양측의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이는 재계 일각에서 인수위 인사들의 색깔을 의심하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현재까지 인수위가 밝힌 새 정부의 재벌 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김대중 정부의 ‘초기’정책 기조로 돌아가는 것을 재벌 개혁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 한 인수위원의 귀띔이다. 초기 기조란 1998년 1월의 다섯 가지 원칙과 1999년 8·15 경축사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추가한 세 가지 원칙을 합친 이른바 ‘5+3 원칙’을 말한다(24쪽 표 참조). 그러나 2000년 말 이후 세계 경제의 불황을 빌미로 재벌들은 제2의 경제위기설을 유포하며 재경부 등에 로비를 벌인 결과 개혁 기조를 크게 후퇴시켰다.



삼성·LG·SK·현대자동차 그룹 등 주요 재벌들은 새 정부가 무슨 급진 정책을 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재벌들 간에는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다. SK는 공식으로는 오너 경영을 부정하면 안된다고 걱정하면서도, 재계가 겉으로 가장 우려하는 금융사 계열 분리 청구제나 의결권 제한 조처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미 구조 조정 차원에서 SK생명과 증권을 정리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LG는 더 느긋하다.


한 고위 관계자는 “인수위의 생각은 재벌 총수의 황제 경영과 변칙 상속을 막겠다는 것인데 우리 그룹에 어디 ‘황제’가 있는가. 지주 회사로 지배 구조를 바꾸면서 어차피 금융 계열사도 정리할 것이어서 걸릴 게 없다”라며 황제가 있는 그룹이 걱정이지 않겠느냐며 삼성을 겨냥했다. 이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타깃을 삼성으로 못박게 했으며, 또 인수위로 하여금 삼성이 타깃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도록 만든 것이 삼성의 고난도 홍보 전략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삼성 타깃설 왜 나왔나



결국 타깃설이 나올 만큼 다른 그룹에 비해 삼성이 현안이 많은 그룹인 것은 분명하다. 한 경제학자는 “5년 전에도 삼성 타깃설이 불거지지 않았는가. 재벌 정책은 왜 늘 삼성과 충돌하게 되는가. 삼성이 1등 그룹이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삼성만큼 전형적인 재벌 체제를 갖춘 기업이 없기 때문에 누가 뭐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삼성은 후계가 완성된 상태가 아닌 데다 총수의 변칙 증여 건이 법적 다툼 중이어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지주 회사 구실을 하는 삼성생명이 있어 금융회사 계열 분리 청구제도나 의결권 제한 조처가 발동되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사실 재벌 개혁 조처가 강화되거나 완화될 때 늘 삼성이 주목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2000년 이후 김대중 정부의 개혁 조처가 크게 후퇴했는데 최대 수혜자는 삼성이었다. 재벌의 금융 계열사 의결권 제한을 완화하기 위해 공정거래법 11조가 개정됨으로써 삼성의 삼성전자 내부 지분율이 8.51%에서 16.33%로 늘어났다. 2001년 주주총회에 참석한 의결권 행사 가능 주식 수로 내부 지분율을 따져보면 12.81%에서 23.57%로 껑충 뛴 것이다. 이 때 출자총액제한 제도도 재도입되었지만 삼성은 걸릴 것이 없었다. 대신 이 제도 재도입 여부를 둘러싸고 정부·재계·학계가 갑론을박을 벌이는 사이 공정거래법 11조를 슬그머니 개정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재계에서 ‘역시 삼성’이라는 감탄사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재벌들 저항도 만만치 않아



재벌들은 급진적인 정책이 나올 공산이 희박하다고 보면서도 새 정부에 대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재벌원죄론’에 시달린 외환 위기 때와 경영 성과가 좋은 지금은 사정이 사뭇 달라 재벌들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맞서기도 한다. 더 이상 재벌을 옥죄면 투자를 안할 것이며 나아가 본사를 해외로 내보내 산업 공동화를 야기할 것이라는 고전적인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인수위 관계자들은 새 정부가 재벌 정책을 김대중 정부의 초기 기조로 돌려놓으려고 할 테지만 서두르지는 않을 것으로 점친다. 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보다 차분하게 현대상선 4천억원 송금 문제, 삼성과 두산의 변칙 세습 문제 같은 현안을 제대로 다스리는 쪽으로 움직일 것으로 본다. 개혁 조처들은 2004년 총선 이후 정치 지형이 정부·여당에 유리하게 변해야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인수위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노당선자는 재벌 개혁이라는 요란한 깃발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현정부가 재벌 정책의 틀은 잡았기 때문에 제대로 운용만 해도 큰 성과를 거두리라고 보고 있다”라며, 정책보다는 적합한 사람을 발탁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다시 말해 ‘3+1자리’(재경부장관·경제수석·금감위원장+공정거래위원장)에 누구를 앉히느냐가 재벌 개혁의 의지와 강도를 드러내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재벌 개혁 5+3 원칙


5원칙


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 채무 보증 해소


재무 구조 개선


핵심 기업 설정


경영진 책임 강화


3원칙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


부당 내부거래 억제


변칙 상속·증여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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