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과학자의 황무지, 한국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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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재 양성에 인색…‘인력 누수’ 심해
‘금속 공주’‘화공 7공주’…. 공주병에 걸린 공주들이 아니라 여학생이 워낙 드물어 금속·화학공학과 남학생들이 붙인 애칭이다.

서울대 공대는 전체 5천여 명 가운데 여학생이 3백여 명(5.7%)에 지나지 않는다. 2년 전 여성 과학자로서 정체성 찾기를 내걸고 공대 여성위원회를 창립한 안은영 회장(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3년)은, 이른바 ‘금토끼(금속공학·토목공학·기계공학)’처럼 공대 안에서도 특히 여학생이 드문 전공학과 학생들이 여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는 듯하다고 말했다. 건물에 여자 화장실이 없어 남자 화장실을 ‘도둑 출입’하고, ‘조인트 MT’(공대 일부 학과는 여자 대학 특정 학과와 우정 MT를 같이 간다)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애교에 속한다. 공대 여학생들의 가장 큰 불만은 여자 교수나 선배 같은 ‘역할 모델’이 없는 것이라고 안은영양은 말했다.

이공대 여학생 극소수…연구소에서는 하위직 집중

이는 석·박사 과정에 올라갈수록 여성 숫자가 줄어드는 현실을 반영한다. 97년 현재 전국 이과대학을 졸업한 여학생은 전체의 43.5%, 공대를 졸업한 여학생은 9.5%이다. 그러나 석·박사 과정에 이르면 이 비율은 각각 32.6%와 11.9%로 급감한다. 공대 쪽은 감소 폭이 더욱 커 박사 과정 인원의 불과 2.5%만이 여학생이다(석사 6.2%). 공대에 재직하는 여자 교수는 전국을 통틀어 44명이 고작이다(95년 통계).

학교 밖으로 눈을 돌려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일하는 인력 가운데 여성 비율은 5.1%에 불과하다. 최근 ‘한국 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현주소’를 조사한 윤정로 교수(한국과학기술원)는 △여성들의 진출 분야가 화학·생물학처럼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져 온 ‘부드러운’ 분야에 한정되어 있으며 △ 조직의 위계 질서에서 여성이 상대적으로 하위직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이 연구는 특히 국내 최초로,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여성 연구원 1백52명을 조사한 설문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자기 일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헌신적인 전문가 집단’으로 나타났다. 한 예로, 미혼일 때 연구원들은 남녀 구별 없이 일에서 가장 큰 보람을 찾는다. 그러나 남성은 40세 이상이 되면 일의 중요성(38%)이 감소하지만 여성은 오히려 현격히 증가한다(61%). 그런데도 장래성과 승진 기회, 자기 발전 기회에 대해 여성 연구원들은 남성보다 훨씬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대덕단지에 정책 결정과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위직 여성 연구원은 거의 없다(예외로 화학연구소와 생명공학연구소에 여성 부장이 있다).

한 단계 올라설 때마다 여성 인력이 새어 나가 ‘구멍 뚫린 파이프라인’에 비유되는 이같은 구조를 개선하려면 국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 윤정로 교수의 지적이다. 지난 96년 미국보다 한 발짝 앞서 여자대학에 공대를 설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모혜정 교수(이화여대·물리학)는 미국이 60년대부터 여성을 과학기술계에 진출시키려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여성 인력 중 전문 기술인 비율을 10% 대에서 31.3%까지 끌어올렸음을 상기시켰다.

‘힘의 과학’을 중시한 산업 사회와 달리 21세기는 ‘감성의 과학’이 요구되는 지식·정보 사회라는 것이 모교수의 생각이다. 그런 만큼 과학기술의 미래는 섬세한 감성·창의성·다양성을 갖춘 여성 과학기술자를 제대로, 많이 양성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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