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 끄느라 경제 정책 혼선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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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급한 불’ 끄느라 장기 계획 못 세워…조정역 인정 않는 통치 스타일도 문제…노·사·정 대타협마저 ‘흔들’
당초 획기적 실업 대책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는 4월 초 영국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참석한 자리에서 ‘국민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실업 대책’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그 전부터 국민회의 관계자들은 4월16일로 예정되었던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김대통령이 실업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언론과 국민은 깜짝 놀랄 만한 실업 대책의 내용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워 왔다. 미국의 뉴딜 정책처럼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된다면 정부의 경제 정책은 과거와 전혀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재벌 구조 조정 등 근본 문제 해결 '지지부진'

이 정책에 대한 경제 전문가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못했다. 재원을 조달하는 어려움과 구조 조정이 지연될 가능성을 들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획기적 실업 대책은 갑자기 없던 얘기가 되어 버렸다.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아예 ‘획기적 실업 대책이란 없다’고 못을 박았다. 대규모 공공 정책을 일으킬 재원도 없으며, 시기도 적절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면 획기적 실업 대책이라는 구상이 당초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언론이 그려낸 허상일까.

여권 입장은 물론 후자 쪽이다. 정부가 확보한 재원을 조기 집행한다든가 외자를 유치하겠다는 실업 대책은 얘기한 적이 있어도, 재정 적자를 감수한 한국판 뉴딜 정책은 말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시아·유럽정상회의에서 한 김대통령의 발언은 어떻게 된 것일까. “대통령에게 당시 발언에 대해 물었더니, 와전된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김대통령의 한 경제 측근의 말이다. 그는 오히려 한건주의에 사로잡힌 언론을 비판했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재벌 대책으로 거론되었던 재벌 총수의 사재(私財) 출연이나 이른바 빅딜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적이 있다. 지난 2월 초 연일 빅딜에 대한 논란이 일자 김대통령은 자신이 재벌들에게 빅딜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내년 말까지 부채 비율(총부채/자기자본)을 200%로 낮추라는 정부의 방침도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업종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실시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재계의 반발과 경제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라서였다.

구조조정기금을 둘러싼 논란도 비슷하게 진행될 공산이 크다. 부실 기업의 구조 조정을 돕기 위해 정부 예산과 국제 기구 대출금에서 기금을 확보하겠다는 이 발상에 대해서도 경제 전문가들이 비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실을 확대하기만 하리라는 것이 비판자들의 논리다. 이번주 서방 선진 7개국(G7) 회의에 참석한 울펜손 세계은행(IBRD) 총재는 이 구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외환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끄고 나서도 정부는 경제 위기 해결이 지지부진하다는 인상을 국내외에 심어 주고 있다. 미국 뉴욕에 있는 휴즈허바드 앤드 리이드 법률사무소의 남일우 변호사는 “한국은 외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도, 재벌과 금융기관 구조 조정같이 중요한 문제에는 아직 손을 못대고 있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심어 주고 있다”라고 말한다. 설만 무성할 뿐 외국인 투자가 예상 외로 주춤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이런 인상은 국내에서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이는 경제 정책의 난맥상과 관련이 있다. 미국 라이스 대학 채수찬 교수(경제학)는 김대통령이 당선 직후부터 외환 위기 관리에 진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정책 혼선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5년 임기 동안의 총체적 계획을 세울 틈이 없다 보니, 전략이 없이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노동계의 반발로 노·사·정 대타협마저 흔들릴 기미를 보이고 있다. 노동계는 부실 기업·금융기관 구조 조정과 기아자동차 처리,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합법화 문제 등과 관련해 언제든 거리로 뛰쳐나올 기세다(26∼27쪽 딸린 기사 참조). 여권은 일단 노동계의 이런 움직임을 구조 조정에 저항하는 사용자 때문이라고 보고 이들을 다그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노동계의 이런 움직임은 구조 조정을 늦추려는 재벌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이 이렇게 흔들리는 데는 경제팀을 직접 이끄는 김대통령의 통치 스타일도 한몫 한다는 지적이 있다. 경제 정책 조정 권한을 누구에게도 이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제대책조정회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들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경제 정책이 내부적으로 정리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통령 면전에서 난상 토론을 하기는 힘들다. 자칫 경제대책조정회의도 또 하나의 업무 보고용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 참석자가 사석에서 한 말이다. 당초 경제대책조정회의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유종근 대통령 경제고문도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회의가 밤을 새우면서라도 격론을 벌여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공동 정권의 태생적 한계까지 겹쳐

공동 정권의 태생적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정치적 배경과 정당을 달리하는 경제 관료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내년까지 재벌의 부채 비율을 200%로 낮추는 문제에 대해서,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박태영 산업자원부장관·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간에 말이 약간씩 다르다.

연고가 다르다 보니 주요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관한 계통이나 절차가 흐트러지는 경향도 있다. 한 경제 관료는 “아무개 경제부처 장의 경우,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소속 정당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업무 관련 보고를 하는 것으로 안다”라고 주장했다. 또 경제 정책과 관련된 개념이 혼란스럽거나 이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이 점도 따지고 보면, 외환 위기 관리에 급급해 장기 계획을 세우지 못한 데서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배제된 김대중 정부의 첫 경제팀이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실험적 성격이 강하다는 데 동의한다. 이는 그동안 고도 성장을 주도해 온 주류 경제학계가 외환 위기를 예측하고 대처하지 못한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만큼 새 경제팀을 조화롭게 이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경제 정책 혼선과 노동계의 반발은 새 경제팀의 위기임과 동시에 김대중 정부로서는 처음 맞는 도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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