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신비 '경락'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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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원리의 전제인 ‘氣 흐르는 통로’… 과학적 실체 확인 아직 안돼
사람의 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氣)가 흐르는 통로가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경락(經絡)’이다. 경락은 인체의 주요 부분을 직행으로 관통하는 ‘경맥(經脈)’과, 경맥에서 분출해 신체 각 부분으로 뻗어나가는 ‘낙맥’이 있다. 도로에 비유하자면 경맥은 고속도로요, 낙맥은 지방 도로인 셈이다.

한의학에서 경락은 서양 의학에서의 혈관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락은 기혈 운행의 통로이자, 안으로는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있고 바깥으로는 사지와 연결되어 있다. 한의학에서는 이 경락을 통해 사람 몸의 모든 정상적인 생리 기능이 유지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람 몸에 병리상의 변화가 있을 때 그 변화 상태가 경락을 통해 바로 반영된다고 한의학계는 전제한다.

고속도로에 으레 사람과 차가 쉬어 가는 휴게소가 있듯이, 경락에도 인체의 에너지인 기가 쉬었다 가는 지점이 있다. 사람 몸에 모두 합쳐 3백65개가 있다고 알려진‘경혈(經穴)’이 바로 그곳이다. 한의학의 전통적인 치료 수단인 침이나 뜸을 놓는 자리가 경혈이다. 침은 자극으로, 뜸은 뜨거운 기운으로 경혈이라는 휴게소에 ‘마실 물’과 ‘연료’ 따위를 보충해 줌으로써 휴게소에 모인 기(氣)가 경락을 정상 운행할 수 있도록 기의 세기를 조절한다.

한의학에서 경락의 역사는 한의학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경락에 대한 최초의 설명은, 이미 중국 한나라 때 출현한 〈황제내경〉에서 비롯한다. 경락 이론은 이처럼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한번도 그 존재 여부를 의심받지 않았던 한의학계 최대 전제였지만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첨단 장비로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난점이 그것이다.

세계를 강타한 북한의 ‘봉한 학설’

한의학에서‘당위의 세계’에 속해 있던 경락이 ‘과학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자연과학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무장한 서양 의학이 동양 의학의 신비스러운 존재인 경락과 경혈에 주목하고, 과학적으로 그 실체를 밝히려는 데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북한 의학자 김봉한은 전자현미경·분광분석기 등 첨단 장비를 동원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경락과 경혈이 실재하며, 경락 내부는 디옥시리보핵산이나 리보핵산 같은 생체 활성물질(이른바 ‘봉한 산알’)로 채워져 있다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발표해 세계 의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오늘날 경락 이론은 신경생리학·약리학·전기생리학 분야에서 기능과 구조를 밝히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신경생리학 분야에서는, 경혈에 찔러넣은 침이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전기생리학적 연구를 통해 경혈의 전기적 특성이 밝혀진 바도 있다. 경혈에 해당하는 신체 부위에서는 전기 저항이 높은데, 손상을 받거나 병을 얻었을 경우 해당 장기에 대응하는 경락을 따라 전기 저항이 낮아진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밖에도 독일의 볼 박사에 의해서 경락이 체내 에너지의 전도선임이 입증되기도 했다.

이와 달리 경락 이론에 대한 국내 의학계의 연구는 아직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의학계 스스로가 ‘경락은 당위의 영역’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그 실체를 적극 밝히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한의학연구소 김정헌 연구원(침구과)은 “서양 과학의 힘을 빌려 경락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한계 안에서 과학을 이용하는 일조차 게을리한다면 한의학은 영원히 ‘비과학’의 테두리에 갇힐 것이 자명하다”라고 말한다.

2천 년 동안 형이상학의 울타리에 안주했던 경락 이론이 형이하학 세계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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