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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古來魚인 까닭

예부터 한반도 근해 ‘황금 어장’…조선조 관리 수탈로 포경술 후퇴

기자 ㅣ 승인 1997.08.2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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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한반도 연·근해는 고래의 마당이었다. 오래된 벽화·화석·고래뼈 같은 유물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71년 경남 울주군 반구대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무수한 고래 그림이 한자리에 몰려 있다는 점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벽화로 꼽힌다(위 탁본 참조). 부경대 박구병 명예 교수는 저서 <한반도 연해 포경사>의 지면 21쪽을 암각화 그림 분석에 할애하여 ‘당시에 원시 포경이 활발했다는 증거’임을 밝혔다.

지난 6월26일에는 화석 수집가 김종철씨(46)가 포항시 장량동에서 원형에 가까운 7m 크기 고래 화석을 발굴했다. 화석 감정을 맡은 경북대 양승영 교수(60·지구과학·문화재전문위원)는 2천만~3천만 년 전 신생대 제3기 고래의 화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밖에 경남 상노대島 패총(구석기)과 부산 동삼동 패총, 김해 수가리 패총, 함북 웅기의 굴포리 유적(신석기)에서 출토된 고래뼈들도 ‘선사 시대부터 주민들이 고래 고기를 먹고 뼈로는 연모를 제작했음을 보여 준다.’(<한반도 연해 포경사>).

조선 중기의 학자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고래를 ‘古來魚’라고 적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고기’라는 뜻이다. 박구병 교수에 따르면, 조선 초기까지 한민족이 고래 기름과 고기를 이용한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표착(고래가 죽거나 다쳐서 해안에 밀려옴)하거나 좌초(수심이 얕은 해안에 들어왔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함)한 고래를 포획하는 것이 이때까지의 주요 포경 수단이었다.

조선 초·중기부터 어부들은 기다란 작살을 들고 근해로 고래를 잡으러 나갔다(이규태 <조선견문>). 이들은 작은 배 여러 척을 타고 고래를 구석으로 몰아 창으로 찔러 잡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세계는 15세기부터 ‘포경 전쟁’ 돌입

그러나 이 포경술이 정착하기도 전에 고래에 대한 민심이 180도 돌아서 버렸다. 관아의 수탈 때문이었다. 고래가 표착한 날이면 인근 백성들이 고래를 해체하고 기름을 짜는 일에 징발되었다. 물론 무보수였다. 나졸의 행패와 관리의 수탈에 빗대어 이를 ‘경란(鯨亂)’이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표착한 고래를 바다로 떠밀어 넣어 후환을 없애는 상태가 되었다. 의 저자 이자벨 버드 비숍은 이에 대해 ‘노동 수익이 지나치게 불안정하다 보니 조선 백성들은 아무 구실 없이도 틀림없이 뺏기고 말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빈곤의 보호를 받으려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정리했다.

안타까운 것은 조선 말기의 ‘경란’이 당대의 부조리로 그치지 않은 점이다. 표착·좌초 포경에서 적극 포경으로 전환하던 1500년대는 세계의 흐름에 그다지 늦은 시기가 아니었다. 서양의 바스크족이 9세기부터 포경 기술을 산업 차원으로 발전시켰지만, 세계 포경사는 아직도 낙후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정작 세계가 포경의 열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후였다.

바스크족은 연·근해의 고래가 고갈되자 대형 포경선을 만들어 원정을 나서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고래를 멸종 직전으로 몰아붙인 20세기까지 두고두고 반복되었다. 즉 ‘연안 포경→고래 고갈→기술 개발·원정 포경→고래 고갈→기술 개발·원양 포경→고래 고갈…’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잔혹한 고래 살육사는 ‘대서양→태평양→북극(남극)…’ 순으로, 그리고 대형 고래에서 점차 작은 고래 순으로 초토화 행진을 계속했다. 16세기부터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경 어장 독점을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었다. 18세기의 바다는 영국의 영토나 다름없었다. 19세기는 미국 포경업의 황금기였다.

한국, 근대 포경 뒤늦어 ‘단맛’ 못봐

서식지를 옮기기도 하고 포경선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지구상에 고래의 안전 지대는 없었다. 고래는 떠다니는 유조선이었고, 황금의 엘도라도였다. 체온 저하를 막기 위해 발달한 고래의 지방층이 스스로를 죽이는 숙명의 덫이었던 것이다. 20~30m에 달하는 거구의 피하에 30~50cm 두께로 덮인 지방층은 엄청난 기름을 생산했다. 포경선이 실어오는 고래 기름 수십만 배럴은 산업혁명의 총아인 기계를 돌리는 윤활유로, 또 유럽과 미국 대륙의 도시를 밝히는 조명(양초·등) 연료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게다가 고래는 버릴 데가 없었다. 고래 수염은 최고급 코르셋과 플라스틱으로 쓰였고, 고기와 내장은 식품·사료가 되었으며, 그밖의 부분도 화장품 원료·장신구·공예 재료로 요긴했다. 조조바 나무의 기름이 윤활유로 대체되고, 석유와 화학 플라스틱이 개발되면서 비로소 ‘고래 러시’가 한풀 꺾였지만, 이번에는 최첨단 공법으로 설계된 거대 포경선이 고래 싹쓸이 채비를 갖추고 나섰다. 결국 고래를 살리는 길은 ‘포경 금지 협약’밖에 없었다.
고래 러시의 파장은 고래의 비극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에게까지 번졌다. 남태평양 원주민들은 유럽 선원이 날라온 유행성 감기·결핵·콜레라 등에 감염되어 떼죽음을 당했다. 1770년 4만명에 달했던 타히티 섬 인구가 1830년 9천명으로 줄었고, 1875년에는 피지 섬 주민 3만여 명이 홍역으로 죽어갔다.

그 와중에 포경 선진국은 차근차근 국력을 축적했다. 이들 나라의 포경 개척기는 산업의 중흥, 선박 기술의 비약적 발전, 과학의 개화, 지리상의 발견 등을 단숨에 이룩한 문명의 황금 시대였다. 일본·러시아 등 후발국에게도 포경의 혜택은 남김없이 베풀어졌다. 일본의 경우 고대부터 원시 포경이 발달해 왔지만, 근대적 개념의 포경이 시작된 것은 16세기부터였다(이브 코아 지음 <고래의 삶과 죽음> 참조).

조선 말기 ‘경란’의 부조리는 일본의 경우와 반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천혜의 한반도 고래 어장은 미국·일본·러시아의 각축장으로 변했다(왼쪽 맨 위 그림 참조). 러일전쟁도 얼마 정도는 포경 전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한반도 연해 포경사> 참조). 46년 김옥창씨가 일본의 목조 포경선 2척을 구입해 조선포경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우리나라도 처음으로 근대적 방식의 포경에 합류했다. 일본 포경선에서 일했던 숙련된 선원들이 합류하면서 포경업은 금세 활기를 띠었다. 60년대에는 포경회사 11개, 포경선 20척 규모로 성장했고, 74년에는 원양 포경에 진출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한국의 포경은 출발이 너무 늦었다.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었지만, 국제포경위원회에 가입한 78년은 ‘상업 포경 모라토리움’ 시행을 불과 8년 앞둔 시기였다. 한 시대의 과학을 견인하는 ‘포경의 깊은 뜻’은 꿈도 꾸어 보기 전이었다. 연계 산업(혹은 과학)은 그만두고라도, 고래에 관한 연구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포획한 고래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포경은 빈곤 시대의 수출 산업으로 본분을 다했다.

86년 모라토리움 시행에 즈음하여 23척에 달했던 한국 포경 선단은 3척을 남기고 모두 폐기·변용되었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포경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데 실패한 우리가 고래 연구 경쟁에서까지 밀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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