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만도 못한 취급에 통곡한다”
  • 사회·정리 정희상 기자 (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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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감염인 4명 좌담/“검진 비용 지원 중단 은 죽으라는 얘기”…“주변 시선이 가장 무서워”
1천7백여 명으로 알려진 국내 에이즈 감염인들은 당혹스럽다. 여수 에이즈 파문이 확산되면서 에이즈 감염인 모두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에이즈 감염인 4명을 초대해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과 여수 구여인 사건을 들여다보았다. 좌담에 응한 감염인들은 전국을 돌며 청소년에게 에이즈 예방 교육을 하거나 감염인 모임을 만들어 에이즈 전파 방지 활동을 적극 펴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언제 어떻게 감염되었으며,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떠한가?


박○○:1994년 고향에서 교통 사고를 당했다가 병원에 실려가 감염 사실을 알았다. 병원에서 보건소에 연락하는 과정에서 가족은 물론 지역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져 아무도 모르게 고향을 등졌다. 그동안 주유소와 편의점 아르바이트, 주점 종업원 등 안해 본 일이 없이 살아오면서 번번이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 쫓겨다녔다. 차라리 감옥에나 가자고 생각해 한때 절도죄로 감옥까지 갔지만 벌레 취급을 받기는 감옥이 더했다. 최근에는 감염인 지원 단체 일을 보고 있다. 감염된 후 8년 동안 건강하게 지냈는데 요즘 들어 기침이 심해지고 기운이 없어져 활동하기 힘들다.


임○○:7년 전인 스물두 살 때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과로로 쓰러지는 바람에 친구들 등에 업혀 은평구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감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이제 20대 초반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세상을 죽도록 원망했지만 차츰 체념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다. 지금은 테이프 외판원을 하는데, 최근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 치료받고 있다.


김○○:5년 전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보건증이 필요해 보건소에서 피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감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건강하다. 유흥 주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8년 전 동거하던 사람이 감염자라는 사실을 털어놓아 검사받았더니 나도 감염된 것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동거인이 너무 원망스러웠지만 사랑했기 때문에 그냥 보내주었다. 요즘은 전화 교환원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


사회:여수 구여인 에이즈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임:나는 새삼스럽게 ‘세상 사람들이 알면 죽이려고 덤비는 끔찍한 병을 내가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꾸 떠올라 견디기 힘들다. 이런 분위기라면 죽기 전까지 내가 대체 무슨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지 아무래도 수긍할 수 없어서 반발하는 마음으로 살 것 같다.


이:구씨를 엄중 처벌하자거나 심지어 얼굴을 공개하라고 난리를 치는 남성들에게 자기는 정당하냐고 묻고 싶다. 모르는 사람과 한번이라도 성접촉을 했고, 성병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에이즈에 감염될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지 왜 구씨만 탓하나.


김: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떤 사람들은 대놓고 감염인을 사회에서 격리하자고 한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는가. 숨어버리고 싶다. 보건 당국은 구씨에게 정보도 안 주고 상담도 안해줬다고 본다. 경찰에 잡혔을 때 보건소에 연락했을 텐데 어떻게 감염인인 구씨의 신분이 언론에 노출되고 사진까지 찍혔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런 행위도 에이즈 예방법 위반에 해당한다.





사회:감염인이 급증하고 있다. 확산을 막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임:모든 사람들이 성접촉을 할 때 예방 조처 없이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예방하는 수밖에 없다.

박:감염인들이 에이즈 예방에 나설 수 있도록 더 많은 지원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나는 에이즈예방협회의 지원으로 지난 몇 년간 전국의 중고교와 교도소를 돌며 내 감염 경험담과 예방법을 강연해 왔다. 다른 감염인들에게도 이런 활동을 할 기회가 더 많아져서 에이즈에 대한 일반인의 터무니없는 인식을 고치고 예방 효과도 거두게 하면 좋겠다.

임: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한국 남자는 성접촉 때 콘돔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번 구씨 사건을 보아도 남자들 절반 가량이 콘돔 사용을 기피했다고 하지 않은가. 감염인도 건강하면 성생활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 접촉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반드시 콘돔을 사용한다. 대개 남자들은 성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콘돔 사용을 기피하는데, 자판기에서 파는 5백원짜리 대신 편의점이나 약국에서 파는 3천원짜리 콘돔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성감을 살리면서도 감염을 예방할 수 있어 감염인 사이에서는 그 방법을 쓰고 있다.


사회:최근 보건복지부가 감염자에 대한 검진 비용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우리같이 돈 없는 감염인에게는 죽으라는 말과 같다. 감염인 1인당 순수 치료제 약값만 연간 5백만∼6백만 원이 들고, 검사비는 80만원 정도 든다. 정부가 지원을 중단하면 치료를 포기하거나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감염자들이 너무 많다. 더구나 감염자라는 이유로 약값을 마련하기 위한 취업도 어려운 현실이다.


김:우리처럼 젊어서 감염 사실을 알게 된 사람 못지 않게 40대 이후 발병하고서야 감염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을 치를 무렵인 20~30대에 감염되었지만 자기도 모르고 살다가 40대 이후에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다가 알게 된 경우이다. 해마다 에이즈 치료비가 지원 예산을 초과할 정도로 증가하는 것은 그런 중증 발병 환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보고 있다.


박:복지부에서는 생계가 어려운 감염자를 위해 검사비도 의료보험 급여로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한다. 급여 처리만 되어도 문제는 줄어들 것이다.


사회:감염인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


임:내가 감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도 나를 별다르게 취급하지 말고 어울려주었으면 좋겠다. 정부에서 연결해준 간병인조차도 나를 너무 불쌍하게 보고 맨날 발병하지 않았느냐고 전화한다.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지나친 걱정은 ‘맞아 내가 에이즈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구나’ 하는 스트레스를 받게 만든다. 직장으로도 그런 전화가 오면 공개될까 봐 불안해 못살겠다.


이:맞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무섭다. 나는 에이즈 치료제와 합병증 치료약을 하루에 열번 정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일터에서는 약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보는 사람마다 무슨 약이냐고 묻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먹는 때도 많지만 요새는 시선이 두려워 약을 자주 거른다.


김:에이즈 감염인을 선정적으로 보도한 신문이나 잡지 기사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언론은 대부분 우리 감염인에게 숨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한국도 미국이나 독일처럼 감염인들이 스스로 공개해도 될 만큼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해줬으면 좋겠다.


박:우리도 시한부 인생을 사는 다른 중증 당뇨병 환자나 말기 암 환자처럼 가족과 주변의 온정을 받고 살다가 가고 싶다. 치료제가 나오지 않는 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꽃도 더 아름다워 보이고 희로 애락도 일반인보다 더 진하게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숨어 살아야 한다. 제발 우리를 좀더 따뜻하게 대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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