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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살맛’, 중소기업 ‘죽을맛’

수출은 최고치 경신, 내수는 최악의 침체. IT산업은 호황, 비IT산업은 불황. 한국 경제가 구조적인 양극화 현상에 신음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들이 고사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살길은 있는가.

이철현 기자 ㅣ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8.31(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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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19세기 영국의 소득 분배 유형을 연구하다가 인구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20 대 80 법칙’을 발견했다. 파레토는 또 19세기 영국에서 발견된 부의 불균형 현상이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이 경제학자가 지금 한국 경제를 본다면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80 대 20 법칙을 10 대 90 내지는 5 대 95 법칙으로 수정하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지금 부와 소득이 지나치게 소수에 집중되어 경제 활력을 앗아가는 현상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잇달아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내수(소비와 투자)는 뒷걸음질치는 수출·내수 양극화로 고전하고 있다. 또 중화학공업·IT(정보기술)산업·제조업은 호황이지만 경공업·비IT산업·서비스업은 불황인 산업간 양극화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대기업·우량 기업·수출 기업과 중소기업·비우량 기업·내수 기업 사이의 기업 양극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고용과 임금 구조 또한 가파르게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경제 양극화가 치명적인 까닭은 일자리 창출 효과가 적은 수출 위주 대기업만 호황을 누리고 국민 경제를 이끄는 중소기업이 고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같은 내로라 하는 기업들은 유례를 찾기 힘든 수출 증가세에 힘입어 경영 실적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이에 반해 중소기업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장기적인 내수 침체에다 수입 원자재 가격까지 올라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소기업협동중앙회가 한국과 일본의 중소제조업 주요 경영성과(1997~2002년)를 비교·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에 비해 중소 제조업의 1인당 부가가치는 1997년 38.4%에서 2002년 32.2%로 크게 낮아졌다.

중소기업은 전체 산업 생산의 70%를 차지하고 전체 임금 노동자의 90%를 고용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지금처럼 설비 투자와 고용 인원을 줄이면 투자와 소비로 구성된 내수가 살아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서중해 연구위원은 “일본이 무서운 것은 ‘무라타’처럼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한 중소기업들이 소니·미쓰비시 같은 대기업들을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를 짓누르는 국내외 변수들은 하나같이 중소기업에 치명적이다.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내수 침체의 핵심 요인은 4백만명에 육박한 신용불량자다. 현재 신용불량자는 소비 욕구가 가장 왕성한 20~30대에 집중되어 있다. 빚을 내 소비할 정도로 내수 경기를 이끌어왔던 20~30대 소비자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실업 상태로 내몰리면서 생필품을 제외한 나머지 제품에 대한 소비가 크게 줄고 있다. 내수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 수익 구조가 악화한 기업들은 신규 채용을 줄이게 되고 청년 실업자는 길거리를 채우고 있다. ‘소비 위축 → 기업 수익성 악화 → 신규 채용 감소 → 청년실업률 증가 → 소비 위축’이라는 악순환의 사슬이 형성된 것이다.

20~30대의 소비 위축으로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곳 가운데 하나가 속옷 업계이다. 20~30대 여성이 주고객인 속옷 ‘비비안’을 생산·판매하는 남영L&F는 지난해 매출 2천3백억원으로 21.5%나 성장했으나 올해 매출(6월 결산)은 1천9백억원으로 줄었다. 또 지난해 순이익은 85억원이었으나 올해는 11억원으로 줄었다. 김진형 남영L&F 사장은 “지난해 사업 계획을 수립하면서 올해 경기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전망보다 더 나빠졌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불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여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수 침체와 함께 이 회사를 궁지로 몰고 있는 것은 중국 업체의 등장이다. 중국 업체들이 저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중·저가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남영L&F는 시장을 세분화해 고급 제품은 국내에서 생산하고 중·저가 브랜드는 중국 칭다오나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만들어 직수출한다. 중국에서 생산한 제품의 원가는 국내 생산 제품의 65~70%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출품이 완성품이 아니라 소재인 데다 전제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아 이 회사는 내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내수가 살아나기 전에는 경영 실적을 개선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성용 속옷 1위 업체인 남영L&F가 이 정도이니 다른 업체들이 겪는 어려움은 불 보듯 뻔하다. 남석엽 남영L&F 관리본부장은 “지금까지 내부 유보된 자금이 있다. 내수 침체가 올해 말까지 지속된다면 재무 구조가 취약한 경쟁 업체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내수 침체에 영향을 덜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동복 업체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유아복 브랜드 ‘해피랜드’로 유명한 (주)EFE도 내수 침체가 지속되자 ‘5% 운동’을 벌이고 있다. 임용빈 (주)EFE 사장은 “지난해 8월 내수 침체를 예상하고 비용은 5% 줄이고 생산성은 5% 늘리는 방안을 실행해 경기 침체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수 침체 못지 않게 아동복 업체를 힘겹게 하는 것은 시장 축소이다. 출산율이 낮아져 신생아 수가 40% 가량 줄어들면서 고객 수가 절대적으로 줄었다. 중국 아동복 업체의 시장 잠식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다. 중·저가 제품은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중국에서 생산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은 국내에서 생산하면 중국 업체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거듭하면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는 곳은 건설업체이다. 승강장을 건설하고 재래 시장을 리모델링하는 우주기획은 원자재난을 겪고 있다. 중국이 원자재를 ‘싹쓸이’하면서 자재를 구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핵심 자재인 H빔이나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힘겹게 구한다고 하더라도 가격이 크게 올랐다. 건설 자재 가격이 올해 초와 비교해 지난 7월 40~50%나 상승한 것이다. 이지행 우주기획 전무이사는 “지난 2월 원자재 파동이 있을 때는 자재를 구하지 못해 납기를 지키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라고 말했다. 건설 원가는 크게 올랐지만 가격에 곧바로 반영할 수가 없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수주를 받아야 할 처지인데 1년 전에 책정된 예산을 무시하고 납품 단가를 올려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부품 업체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기아 자동차에 핵심 엔진 부품을 공급하는 ㅇ회사는 지난해 국내 수집상이 수거해온 고철 중 니켈처럼 필요한 금속만 따로 산정해 사들였으나 지금은 고철 전체를 사야만 한다. 이 회사 양 아무개 사장은 “불필요한 금속 성분까지 모두 사들여야 하므로 구매 단가가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를 거부했다가는 중국으로 수출해버리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다 사들인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또 다른 주범은 고유가다. 석회석 일종인 백운석을 생산하는 대흥자원개발은 고유가로 인해 크게 늘어난 물류비용 때문에 악전고투하고 있다. 생산 원가를 낮추지 못하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잇달아 퇴출되고 있다. 이범석 대흥자원개발 사장은 “1997년 사업 인·허가 당시 경쟁 업체 명단이 A4 용지 3쪽에 달했으나 지금은 A4용지 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일시멘트나 아세아시멘트 같은 상위 업체들은 10년이 넘는 흑자 행진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으나 중소 업체들은 하나씩 고사하고 있는 것이다.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이범석 사장은 영업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사장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객들을 만나기 위해 한 해 10만km 이상 달리다 보니 2~3년마다 차를 바꿔야 한다”라고 말했다.

올해 2/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5.5%다. 외환위기 이후 최대 위기라는 재계의 불만이 무색할 정도로 견실한 성장세이다. 하지만 경제 주체들은 경제지표가 체감 경기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재정경제부도 8월24일 이례적으로 논평을 내고 경제지표에 통계적 착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출 기업과 내수 기업, IT 업종과 비IT 업종 사이의 지표상 격차가 평균치를 내면서 상쇄되기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내수 기업·비IT 업종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경부는 10대 차세대 성장 산업,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육성 대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노동집약적인 산업 구조에 대한 조정은 더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경제 체질 전환에 따라 산업 양극화 현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은 경기 변동 과정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중소기업이 산업 구조 조정 과정에서 숙명적으로 벌어지는 양극화 현상에 대처하지 못하면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디스플레이 부품 업체인 평화미디어컴은 국내외 사업 환경 변화에 맞추어 자기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 회사는 LG필립스LCD나 삼성SDI 같은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어 안정된 수입 구조를 갖고 있지만, 생산 단가를 낮추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개발비를 늘리고 있다. 이미 중국 업체들이 주력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해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 회사는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회사 미래를 이끌어갈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중소기업은 퇴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익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이 문을 닫는 것은 국민 경제 측면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 자리를 대체할 유망한 중소기업들이 꾸준히 생겨나야 한다. 정부는 8월27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제1차 규제개혁추진회의’를 열고 중소기업 창업을 지원하는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우선 관리지역(옛 준농림지역) 내 공장 설립을 전면 허용하고 창업 기간을 100일로 대폭 축소하고 창업 비용도 10분의1 수준으로 줄일 방침이다.

하지만 참여정부 출범 이후 중소기업 지원 대책은 여러 차례 나왔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재계는 개별적인 중소기업 지원 정책보다는 내수를 부양할 만한 거시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정부는 산업 내지 업종 별로 대응하는 미시적인 접근 전략을 선호하고 있다. 경기부양책은 수술 환자에게 영양 주사나 진통제를 놓는 것과 같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중소기업은 영양제나 진통제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하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어찌 보면 양극화가 아니라 일극화로 치닫고 있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만 살아 남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경제 일극화’가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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