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총의 위기는 이수호의 기회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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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외환 이위원장, 기아차 사태로 리더십 세울 전기 마련할 수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사죄드립니다.” 이수호 위원장과 강승규 부위원장 등 민주노총 집행부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지난 1월26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에 있는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시종 침통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민주노총 소속인 기아자동차에서 일어난 ‘기아차 사태’가 노동계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듯 이날 이위원장은 여러 차례 ‘죄송스럽다’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올해로 창립 10주년, 이수호 위원장 취임 1주년을 맞은 민주노총은 이처럼 새해 벽두부터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노동운동계가 처한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수호 체제가 안팎에서 크나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노동계를 뒤흔든 기아자동차(기아차) 사태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애초 기아차 노조 광주지부장 정 아무개씨가 채용을 미끼로 구직자들로부터 돈을 받아 챙긴 이 사건은 구청 공무원, 정치권 인사 등 100여 명이 연루된 대형 게이트로 비화하고 있다. 다른 대기업 사업장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는다. 이 사건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수호 위원장은 이 사건을 ‘사측의 입사 비리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사측이 채용권을 배분해주고 이권을 챙긴 사건이다. 매수 놀음에 놀아난 노조 간부도 용납할 수 없지만 후진적인 인사·노무 관행이 본질적 문제다. 채용 비리는 채용권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라는 것이다.

이위원장의 주장은 새겨 들을 면이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한 회사측 책임 또한 노조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다. 회사 담당자와 연루된 취업 브로커까지 등장한 ‘권력형 입사 비리’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그러나 기아차 사태가 불거지자 보수 언론들은 ‘귀족 노조’ ‘권력 노조’ ‘그들만의 운동’ 따위 용어를 사용하며 대기업 노조, 나아가 노동운동 전반을 강력하게 비판하기에 바빴다. 부분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며 그야말로 노동운동계에 대해 대공세를 펼쳤다.

“노조원들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 인사들 가운데는 사측을 비판하며 ‘개인 비리’라고 사건을 규정한 이위원장의 인식이 너무 안일하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노조 간부가 채용을 미끼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노동운동계에 준 충격파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 보인다.
지난해 2월 출범한 이수호 위원장 체제는 ‘내부 혁신을 통해 민주노총을 변화시키겠다’고 표방했다. 국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좌표를 설정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워 노동운동계 안팎에서 큰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국민’을 내세운 이수호 체제의 민주노총은 안팎에서 두드려 맞으며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민주노총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또 하나의 특권층’ ‘대기업만을 위하는 민주노총’ 등의 이름으로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글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실 빨간불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켜졌다. 위기의 징후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전태일 노동자료실 대표를 지내는 등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온 박승옥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은 지난 9월 계간 <당대비평>에 기고한 글에서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은 ‘왕자병 환자’로 치부되는 경향 아래 자신을 옹호해주는 어떤 사회 세력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다. …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는 다수 노동자들의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질타했다. 박씨의 문제 제기는 노동운동권에 ‘위기냐, 아니냐’는 이른바 위기 논쟁을 촉발했다. 그러나 말은 무성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상학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은 “투쟁 방식, 사업 방식에서 사회 전반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노동운동계가 위기를 맞았다고 볼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현 국면이 ‘위기’라기보다는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수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생각이 이원장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변화를 더디게 만든 한 요소였다. “언제는 어렵지 않았냐”라는 이수호 위원장의 말에서 이런 인식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참여성노동복지터 전순옥 소장은 “노동운동이 대단한 위기를 맞았다. 조합원들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전소장은 “이번 사건을 개인 문제라거나 사측이 유혹했기 때문에 그물에 걸렸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노조는 도덕성과 정의와 헌신성이 있을 때 힘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도 “사회적으로 노동운동이 소외·배제되고 있다. 노동운동의 위기가 심해지는 단계이다”라고 진단했다.

민주노총이 지난해 10월 실시한 자체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46.3%가 5년 후에도 노동운동의 전망이 밝다고 보았지만, 민주노총 간부 3백52명 가운데 63.6%인 2백20명이 ‘민주노총이 위기다’(63.6%)라고 답했다.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20.8%인 72명에 불과했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로 갈려

이런 가운데 이수호 체제는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하투(夏鬪)의 핵심이었던 지하철 노조와 LG칼텍스정유의 파업이 여론의 외면 속에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난 사건이 계기였다. 강경파는 너무 온건하게 대응하고 있다며 지도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지난 1월20~21일 열린 제33차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복귀 여부를 결정하는 ‘사회적 교섭에 관한 방침안’을 논의할 차례가 되자 속속 회의장을 빠져나가 토론 자체를 무산시키며 힘을 과시했다.

민주노총은 현재 크게 세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수호 위원장을 지지하는 ‘국민파’, 단병호 전 위원장 시절 지도부였던 ‘중앙파’, 이들보다 더 급진적인 ‘현장파’다. 중앙파와 현장파를 합쳐 범좌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국민파가 다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행동력이 있는 대기업 노조들은 여전히 투쟁력을 강조하는 범좌파 쪽이 세다. 이들의 실질적인 발언권이 만만치 않아 이위원장이 자기 구상대로 민노총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다.

노동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위원장이 생산적인 결론을 낸 것이 없다. 변화를 주장한 그가 실질적으로 변화시킨 것이 거의 없다. 지하철 파업 때 리더십을 갖고 끌고 가지 못했고,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문제도 1년 가까이 시간을 끌었다”라고 말했다.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는 “이수호 체제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지난 1년간 대화다운 대화는 없었던 반면 어느 순간 손쉽게 과거의 투쟁 노선으로 복귀하곤 했다. 민노총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조직이 되었는가? 오히려 그 반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노동계 내부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한 대학 교수는 “이위원장은 새로운 운동을 해보겠다는 의지는 있는데 그것을 실현할 힘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위원장은 “1년 내내 발목을 잡았다”라며 범좌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어떤 일을 일단 해보게 하고 못하면 비판해야지 아예 해보지도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항변이다. 전순옥 소장은 “이위원장이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상황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기아차 사태는 이위원장에게 위기만은 아니다. 기회일 수도 있다. 기업이 변하는 만큼 노조도 빠르게 변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요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 초심으로 돌아가 도덕적 재무장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여건, 투쟁성을 내세우기보다는 국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운동에 대한 필요성 등은 길게 보아 이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독약이냐 약이냐는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철저한 반성을 통해 새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노사정위에 참여 안하면 더욱 고립될 것”

노동계 안팎에서는 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다수다. 노동계가 의사 결정의 중요한 축으로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 만큼 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법을 지키는 투쟁을 해야 하고, 노동조합의 재정 투명성을 검증할 장치를 빨리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현재의 기업별 노조 체제를 산별 노조나 업종별 노조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시각도 강하다.

전순옥 소장은 “노동운동이 초심으로 돌아가 비정규직·영세 사업장 등 소외된 약자 편에 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대기업 노조는 권력화하고 관료화했다. 보수 언론이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래도 솔직해지는 것이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을 살리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한 노동운동가는 노동운동이 항공모함과 같다고 말했다. 외부의 요구가 있다고 해서 방향이 빠르게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아차 사태를 계기로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얼마나 강하게 자성하는 흐름이 일어나는가, 이수호 위원장 체제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는가에 따라 기로에 선 한국 노동운동의 앞날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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