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많고 말 많은 DJ ''신세 갚기'' 인사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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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장관 임명 이후, ‘보은형’ ‘리베로형’ 인사 방식에 비난 일어
한빛은행 사건으로 물러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 후임에 김한길 의원이 임명된 것을 두고 정치권 안팎의 여론이 좋지 않다. ‘담당 업무에 전문성이 없다’ ‘언론을 장악해야 한다는 반개혁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성적 비판에서부터 ‘소설 좀 썼다고 장관 자리에 오를 수 있나’라는 1차원적 비판에 이르기까지, 긍정론보다 부정론이 우세하다.

하지만 김장관 개인에 대한 비판보다 더 혹독한 비난이 임명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쏟아지고 있다. 한 언론계 인사는 “김대통령의 인사에는 신선함이 없다.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기보다 지나치게 몇몇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내부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한 당직자는 “두번째 전국구 공천에 정책기획수석 정도면 대선 때 텔레비전 토론을 잘 도운 데 대한 빚을 갚고도 남은 것 같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김한길 카드’를 쓰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불평을 터뜨렸다.

대대적인 개각도 아니고 어찌 보면 별 무리 없이 넘어갈 법한 일개 부처 장관 임명을 놓고 이렇게 당 안팎의 비난 강도가 높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번 박지원 장관 사퇴 과정에서도 입증되었듯이, DJ 정권 출범 이후 김대통령이 궁지에 몰린 대형 사건의 배후에는 늘 ‘사감(私感)에 따른 인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유형은 두 가지. 하나는 대선 때 입은 공을 갚는 ‘보은형 인사’이고, 다른 하나는 한번 잘 보면 일의 성격에 관계없이 전천후로 중용하는 이른바 ‘리베로형 인사’다.

보은형 인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사람이 김중권 초대 비서실장. 그는 1997년 대선 과정에서 ‘20억 + α설’의 지뢰를 단숨에 제거해준 일등공신이다. 동교동의 한 핵심 인사는, 만약 김씨가 반대편에 서서 ‘20억 외에 또 있었다’고 한마디만 했다면 선거는 치르나 마나였을 것이라며, 당시 DJ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과 천용택 2대 국정원장도 보은형 인사의 수혜자로 꼽힌다. 안기부와 군 출신인 두 사람은 대선 당시 DJ의 아킬레스건인 색깔론을 차단한 공이 크다.

김태정·손 숙 전 장관은 ‘보은 인사’의 압권

이들 세 사람은 DJ의 인재 풀 가운데 몇 안되는 ‘청와대·안기부·군 사정을 아는 테크너크랫’이었다는 점 때문에, 단순히 보은형 인사의 범주에 포함해서는 안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DJ의 한 측근은 “경제 부처라면 모를까 권력의 속성상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을 단순히 경력만 보고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DJ가 세 사람의 충성심을 높이 산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DJ의 전폭적 신뢰를 바탕으로 비서실과 국정원을 주무르던 이들은 각기 옷 로비 사건에 대한 처리 미숙, 언론 문건 파동, DJ 정치자금 관련 설화로 김대통령에게 부담을 안겨 주었다.
이들과 달리 정치권이 이론의 여지 없이 ‘보은 인사’로 꼽는 인물은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과 손 숙 전 환경부장관이다.

김대통령은 지난해 봄 검란(檢亂)으로까지 불린 검사들의 항명 파동과 흉흉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 표적이던 김씨를 법무부장관으로 영전시켰다. 김대통령은 그 후 이러한 인사의 배경으로 1997년 대선 과정에서 당시 여당이 요구한 1992년 대선 자금 수사를 보류한다고 발표한 김태정 검찰총장을 바른 법조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김태정 발탁’에는 대선 당시 김씨가 취했던 태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그러한 DJ의 ‘신세 갚기식 인사’는 옷 로비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를 샀고, 결국 DJ가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태로까지 악화했다.

전문성 없는 인사를 기용했다는 이유로 임명 초부터 여론의 반발을 산 손 숙 장관의 경우 역시 ‘연’이 작용한 케이스. 손씨는 DJ가 야당 총재 시절,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몇 안되는 문화 예술계 인사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인사 역시 한달 후 손씨가 러시아 공연에서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격려금이 문제가 되면서 비극으로 결말을 맺었다.
큰 탈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DJ가 보은성 인사를 했다고 분류되는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윤흥렬 <대한매일> 전무는 언론계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장남인 김홍일 의원의 처남이기도 한 윤전무는 대선 때 홍보 분야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는 점이 크게 고려되었다는 해석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방송가 주변에서는 언론 경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신문사 간부로 발탁되어 눈총을 받은 윤씨가 MBC 사장에 기용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아 언론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4·13 총선 때 김대통령이 전국구 의원 명단을 짜는 과정에서 한 핵심 측근에게 했다는 말은 DJ가 얼마나 빚 갚기에 연연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측근이 “조재환·김방림·윤철상 등 범동교동계 가신들에게 앞 번호를 주는 것보다 참신한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게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조언하자 DJ는 “이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나를 도왔느냐. 이번이 내가 공천을 주는 마지막 기회인데, 이렇게라도 보답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DJ의 용인술 가운데 또 다른 특징으로 꼽히는 리베로형 인사 역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기획예산위원장과 기획예산처 장관을 거쳐 재경부장관에 오른 진 념 장관이나 정책기획수석·경제수석에 이어 재경부 장관을 맡았던 강봉균씨의 경우는 그나마 업무에 일관성이라도 있어 다행인 축에 속한다. 하지만 대북 첩보 기능을 담당하는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대북 특사라는 상반된 역할을 맡겨 국민을 혼란케 하고 있는 것이나, 대북 협상과는 거리가 먼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밀사 역을 맡겨 다른 대북 관련 부처를 허수아비로 만든 것은 야당 총재 시절의 안목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초보 인사’라는 지적이다.

“DJ, 박지원에 중독되어 있다”

특히 김대통령의 ‘박지원 의존도’는 상궤를 벗어난 수준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박씨는 야당 대변인 4년, 청와대 대변인 1년을 하는 동안 여권 내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부지런함과 순발력으로 DJ를 전방위 보필했다. 이 때문에 DJ는 박씨가 장관으로 나간 뒤에도 언론·북한 관계는 물론 국정 운영 전반에 그를 ‘소방수’ 또는 ‘리베로’로 활용했다. 한나라당의 총공세로 정국 운용에 차질을 빚으면서도 김대통령이 그를 끝까지 보호하고자 했던 것도 그의 역할에 대한 미련이 컸던 때문으로 보인다.

DJ의 한 측근은 심지어 ‘DJ가 박씨에게 중독되어 있다’고까지 표현했다. 이 때문에 여권 내부에서는 박씨가 한빛은행 사건 조사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을 경우 DJ가 그를 또다시 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만약 박씨의 위법성이 드러날 경우 대통령이 입을 상처는 옷 로비 사건 때보다 더 클것으로 보인다.

이번 김한길 장관 임명에 비난이 쏠리는 이유는 이런 DJ의 ‘보은성 인사’와 ‘리베로형 인사’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김장관이 문화 예술 분야에 관해 나름의 식견이 있으며,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내는 동안 정책 전반을 많이 공부한 것으로 안다면서 DJ 인사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여권 내부에서조차 DJ가 김장관을 ‘제2의 박지원’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는 실정이다.
‘공로에는 훈장을 주고 능력에는 자리를 주겠다’던 DJ의 인사 철학이 공염불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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