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단체장 후보 교체 꼴불견
  • 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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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단체장 후보 ‘선출→교체 결정→재선출→재교체’ 꼴불견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5월14일 국민회의 전남 해남군수 후보로 최종 확정된 뒤 김향옥씨(50)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말이다.

“서창다리(광산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를 건너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역시 숱한 후보 교체 논란 끝에 국민회의 광주광역시장 후보로 확정된 고재유 전 광산구청장(60)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공천 심사 과정에서 김후보와 고후보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겪은 경험담은 여당 텃밭이라 일컬어지는 호남 지역의 공천 후유증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그만큼 말도 많고, 잡음도 심했던 여당의 공천 심사였다.

해남군수 후보 공천 과정은 경선으로 후보 선출 → 공천심사특위 후보 교체 결정 → 후보 재선출 → 대통령 재가 과정에서 원래 후보로 재교체하는 곡절을 겪었다.

“김봉호 의원, 동생 공천하려 무리수”

국민회의 해남·진도 지구당(위원장 김봉호 의원)은 지난 5월4일 지구당의 면책(面責)·이책(里責)까지 포함한 1천4백여 명으로 후보선정위원회를 구성해 해남군수 후보 경선을 실시했다. 최종 경선에 오른 후보는 김의원의 친동생이자 해남군 의회 부의장인 김광호씨와 지역 언론인 출신 김향옥씨. 당연히 실력자인 김광호씨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막상 개표함 뚜껑을 열자 김향옥씨가 김광호씨를 41표 차로 제치고 승리했다. 김봉호 의원은 김향옥 후보와 지역구 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생의 탈락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김향옥씨에게 축하하고, 협력을 약속했다.

하지만 김봉호 의원은 그 뒤 말을 뒤집고 국민회의 공천심사특위(위원장 김영배)에 이의를 제기했다. 김향옥 후보의 지명도가 낮고 당선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후보를 재선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봉호 의원은 “동생이 선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이책까지 포함해 후보선정위를 구성했다. 그러나 경선이 끝난 뒤 상경해 주위의 의견을 들은 결과 김향옥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후보를 재선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향옥 후보는 5선 의원이자 당내 서열 제 2인자인 김봉호 의원을 정면에서 공격하고 나섰다. 김후보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김봉호 의원이 내가 선거 자금이 부족하고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탈락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비민주적 독선으로 짓밟아서는 안된다”라며, 만일의 경우 무소속 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공천심사특위는 이에 아랑곳없이 5월13일 해남군수 후보 재선출을 결정했다. 정가에서는 이를 두고 당내에서 차지하는 김봉호 의원의 영향력이 고려된 것으로 분석했다.

김봉호 의원은 13일 저녁, 8명으로 선정위원회를 급히 구성해,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김창일 현 해남군수를 선출했다. 김창일 군수는 애초 김봉호 의원이 후보로서 부적합하다고 공언한 인사였다. 이와 관련해 지역 언론계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김향옥 후보가 지구당위원장의 횡포로 탈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지구위원장의 횡포로 공천 탈락이 확실해 보이던 김향옥 후보는 마지막 단계에서 기사회생했다. 14일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이 공천자 명단을 들고 청와대로 찾아가 김대중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는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해남군수 후보 문제는 원래대로 해야 할 것 같다”라며,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후보를 교체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구당위원장의 독단과 부당 행위에 대통령이 쐐기를 박은 것이다. 김봉호 의원은 “김향옥 후보가 지명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김후보를 당선시켜 반드시 내 명예를 회복하겠다”라고 해명했다.

고재유 광주시장 후보도 대의원대회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된 뒤 끊임없는 자질론 시비와 막판 금품 수수설에 휘말리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고재유 후보가 금품 수수 시비로 받은 타격은 선거 과정에서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고재유 후보는 대의원대회에 앞서 시민단체들이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전문성이나 개혁성 등 평가 항목에서 꼴찌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난 4월25일 치러진 경선에서 송언종 현 시장·강운태 전 시장을 제치고 선출되었다.
광주 시민의 실망·상실감 엄청나

고후보가 선출된 것을 두고 광주 지역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경선에서 선출되었고 절차상 흠이 없으니 공천해야 한다는 의견과, 국민회의 공천심사특위가 지역 여론을 종합해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후보 교체 논란은 5월7일 국민회의 광주 남구지구당 대의원 오종렬씨(64)가 경선 직전인 4월24일 고재유 후보측 선거운동원인 위성삼씨(44)로부터 고후보 지지 명목으로 백만원을 받았다고 양심 선언을 해 위씨가 구속되면서 급격히 후보교체론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후보교체론과 불가론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박광태 국민회의 광주시지부장과 지구당위원장들은 결국 중앙당 공천심사특위에 모든 권한을 위임했고, 국민회의는 14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후보를 교체할 수 없다며 후보 교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재유 후보는 “일부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 반드시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라고 밝혔다(오른쪽 위 인터뷰 기사 참조).

지난 14일 확정된 국민회의 공천 결과에 대한 대체적인 분석은 호남 지역 등 텃밭에서는 대의원대회나 후보선정위원회의 결과를 존중했고, 서울·수도권 지역에서는 대의원대회 결과를 뒤집고서라도 당선 가능성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특히 광주시장·해남군수 공천 사례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의원들이 선택한 경선 결과를 존중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을 지켰다는 평가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지금 텃밭인 광주·전남에서 공천 후유증을 심하게 겪고 있다. 국민회의가 당선 가능성이나 개혁성·도덕성을 공천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나주·화순·담양·장성·보성 등 ‘불공정한 경선’이라며 결과에 불복하거나 공천에서 탈락한 현직 단체장들은 벌써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고 지구당위원장들의 횡포에 설욕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여당 텃밭인 호남 지역에서 공천 후유증과 관련한 광주 시민들의 실망과 상실감은 크다. 지역 인사들의 모임인 ‘1천인 시민위원회’는 국민회의의 공천에 실망해 한때 무소속 시민 후보 추대까지 깊숙이 논의했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서울시장이나 경기지사 후보는 당내 기반이 전혀 없는 인물까지 무리하게 영입하면서도, 여당의 텃밭이라고 자처하는 광주시장 후보로는 자질이 미달하거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후보를 왜 그대로 공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 시대’를 만든 광주 민심이 지방 선거에서 여당 지지보다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후보 쪽에 기울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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