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향해 쏘는 최형우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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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문 후 발걸음 분주…‘비주류 실세 확인·충성심 과시’ 이중 전략
지난 2월 당정 개편 이후 줄곧 침묵을 지켜 오던 민자당 중진 실세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윤환 정무장관이 권력 구조 개편 가능성과 권력 신주체 형성 필요성을 거론한 데 이어, 이한동 국회 부의장은 경기도 지사 후보 경선과 관련해 ‘경선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 기반과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중진들의 불가피한 ‘제목소리 내기’이다.

민주계 실세 최형우 의원도 최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초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당내 인사들을 여러 형식으로 접촉했고, 개혁 특강에도 활발히 나서고 있다. 연고지인 부산·경남 지역 나들이도 부쩍 잦아졌다. 그러나 ‘주류 내의 비주류’라는 복잡미묘한 처지이니만큼, 그의 행보는 민주계 중심의 당 운영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는 다른 중진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지난 4월19일 민주계의 신라호텔 만찬은 ‘활동 재개 신호탄’으로 관심을 모았다. 최의원이 주선한 이 모임에는 황낙주 국회의장, 신상우 국회 정보위원장, 황명수 국방위원장, 서청원 전 정무장관 등 11명이 참석했다. 황의장을 제외하면 대개 최의원처럼 ‘별볼일 없는’ 민주계였다. 김덕룡 사무총장 등 ‘한창 잘 나가는 그룹’은 애당초 초청 대상에 끼여 있지 않았다.

당 지도부 지원 명분 삼아 활동 재개

한 참석자는 비록 ‘정치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최근 민자당의 난기류와 지도부의 난조가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러나 최의원은 ‘이럴 때일수록 어쨌든 협조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유도했다고 한다. 비단 이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최의원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당내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현 지도부에 대한 전폭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사실 지난해 말 개각 이후 최의원은 내색을 별로 안했지만, JP 파동의 주요 원인을 자신의 ‘지도체제 발언’ 탓으로 돌리는 여권 내부의 분위기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뒤이은 민자당 당직 개편에서 김덕룡 총장이 중용되자, 당 안팎에서는 ‘가장 타격을 입은 사람은 최장관’이라는 분석이 나돌았다. 두 사람 주변에서는 그동안 ‘경쟁의식을 인정하기조차 싫어하는 경쟁의식’이 은근히 작용해 온 데다, 재선 총장이 등장함으로써 최의원마저 세대교체 대상이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이 일었기 때문이다.

뒤이은 공천 정국에서 최의원은 내심 강력히 밀었던 후보가 부산시장감에서 일찌감치 제외되고 측근 중 한 사람인 주병덕 전 충북지사가 무소속 출마를 위해 탈당하는 등 ‘비주류의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최의원이 소외 그룹들에게 김덕룡 총장 체제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민주계의 당 운영 실패와 선거 패배는 민주계 전체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줌과 동시에 민정계의 전면 공세를 부를 공산이 크다는 상황 인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최의원은 크고 작은 민주계 모임을 통해 계보의 좌장임을 암묵리에 재확인하는 한편, 당면한 선거 국면을 돌파하는 데 앞장서는 조직인으로서의 충성심을 과시하는 일거양득 효과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김총장 쪽에서는 최의원의 ‘대승적 지원’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당직을 안 맡은 최의원이 외곽에서 도와줄 방법도 마땅히 없는 데다, 최의원이 자신의 말에 어느 정도 무게를 싣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얼마 전 4·19 부상자회 초청 강연을 가졌던 최의원은 5월부터 1주일 간격으로 ‘지방화시대 새 정치’를 주제로 지방 대학원 순회 특강에 나설 예정이다. 개각 이후 오랫동안 칩거하다시피 지낸 그는 지방선거를 계기로 ‘민주계의 좌장’ 역할을 재점검하는 한편, 측면 지원을 명분 삼아 활동 재개에 들어간 셈이다.

“이미지 메이킹은 미래 위한 투자”

그러나 그는 아직도 구체적인 정치 현안을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 지도체제 변화와 부총재 경선을 입 밖에 냈다가 ‘천기 누설죄’ ‘JP 파동의 원인 제공자’로 몰린 악몽에서 채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에 있었던 그 발언 파동 이후 최의원 주변에는 ‘일단 기자들과 만나면 이로울 게 없다’ ‘언론과는 담을 쌓고 살아야 편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그러면서도 ‘21세기형 지도자’ ‘미래형 개혁을 지향하는 정치인’ ‘정보화 사회에 눈뜬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언론을 최대한 활용한다. 4월17일 한 경제 신문에는 앨빈 토플러와 최의원의 미국 현지 대담이 2쪽에 걸쳐 크게 소개됐다.

그의 측근들은 취재진을 만날 때마다 최의원이 정치적 화제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으며, <권력이동> <제3의 물결> 같은 미래학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중국과 미국에 다녀온 최의원은 올해 안에 베트남을 비롯해 두어 나라를 더 둘러볼 예정이다.

정가에서는 이런 최의원의 이미지 메이킹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풀이한다. 그는 집권당 사무총장과 내무부장관을 지내면서 조직 장악력과 돌파력을 유감없이 과시했지만, 기존의 ‘돌쇠’ ‘무사형 정치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주변에서는 집권 후반기에 중용되고 미래를 기약하려면, 이런 과거형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의원의 변신은 이런 전략적 고려와 무관하지 않다.

비정치적인 행보를 통해 가장 정치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최근 행보는 DJ의 ‘현실 정치와 거리 두기를 통한 영향력 확보’와 어느 정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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