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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골드러시’ 큰손들이 움직인다

부유층 ‘갈 곳 없는 여윳돈’ 몰려 금 사재기 소동

주진우 기자 ㅣ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5.2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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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서울을 대표하는 거리였던 종로. 김두한이 호령하던 그 종로통을 지금은 금은방이 접수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종로5가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금은방들은 1990년대 중반 종로4가 종묘 주변부에 진출하더니 단성사·파고다 공원 등을 차례차례 포위해 버렸다. 최근에는 종각에까지 세력권을 계속 넓혀가는 중이다.

이상하게도 금은방 주인들은 한결같이 매출액이 예년의 절반도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종로3가 단성사 뒤에 위치한 ㄱ쥬얼리 방 아무개 사장은 “건물주들이 금은방만 늘리고 있어 하루에 서너 개 팔기도 힘들다. 혼수철인데 현상 유지도 어려운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1년 전 종로2가 YMCA 옆에 문을 연 ㅅ귀금속의 여종업원은 “가격대가 낮은 커플링이 주로 나갈 뿐 금제품은 안 팔린다. 한 돈에 6만원이 넘자 돌반지를 찾는 사람도 뚝 끊겼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은방은 아직도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점령해가고 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4월25일 오후에 들른 종로5가 ㅂ사의 사장은 장사가 안 되어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두 시간 후 전화로 금궤를 사겠다고 하자 사장의 말은 아까와 사뭇 달랐다. 그는 “현재 금 시세가 국제가보다 싸다. 금을 사재기하는 사람이 많으니 가격도 계속 오를 것이다. 좀 전에도 10kg을 산 아저씨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금을 사겠다고 하자 ㄱ쥬얼리 사장도 “금을 안전한 투자처로 보고 투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지난해보다 금덩어리에 투자하는 사람이 2배 이상 늘었다”라고 했다.

귀금속 상가가 밀집한 종로4가에 있는 조흥은행 동대문지점 김 아무개씨는 “금은방 도매업자의 수입과 지출은 몇년 전과 그리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대규모 도매상 10여 곳은 하루 매출 20억∼30억 원, 소규모 도매상들도 5억원 규모 매출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금괴를 수입·판매하는 LG니꼬 김준행 부장은 “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민간 수요는 예전과 비슷한 수준인데 있는 사람들이 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종로3가 ㅅ사 ㄱ사장은 “예물 등 소매 판매는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그나마 우리 가게는 보이지 않게 사가는 사람들 덕분에 먹고 산다”라고 했다.

혼수와 액세서리 등 금 소매 시장은 위축된 반면 일부 부유층이 금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 예금이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로 떨어진 상황에서 증시가 좀처럼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부동산 시장도 잔뜩 움츠리고 있는 가운데 돈 굴릴 데가 마땅치 않은 일부 부유층이 금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이 아무개씨(58·상가 임대업)는 “경기가 불안하면 금이 오를 것이라고 주변에서 권해 금 두꺼비 10여 마리를 샀다. 돈을 번다기보다는 지킨다는 생각으로 투자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강 아무개씨(47·주부)는 “땅을 보러 다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부동산보다는 금을 사는 것이 유행이다. 별도로 세금을 내지도 않고 선물을 하기에도 금이 안성맞춤이다”라고 말했다. 종로5가 ㅈ귀금속 ㅇ사장은 “현금 있는 사람은 금을 사두려 한다. 이라크 돈이 휴지가 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고는 3억원어치 금을 산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종로 귀금속 상가에서는 삼발이(뒤쪽을 짐칸으로 개조한 바퀴 3개짜리 오토바이)에 현금을 싣고 와 금덩어리와 바꾸어 가는 장면도 그리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고 했다.

종로에서 금 도매업을 15년째 해오고 있다는 황 아무개씨(44)는 주로 강남에 사는 50∼60대 돈 있는 사람들이 금에 투자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전쟁을 겪어 금에 대한 남다른 향수를 갖고 있다. 시세 차익을 노리며 사고 파는 사람도 있지만 길게 보고 사두는 사람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금에 투자하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부동산과 주식·채권 모두 안심할 수 없다면 금이 안전한 투자처일 수도 있다. 대신경제연구소 김영익 투자전략실장은 “세계적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팽배한 데다가 국내에는 북한 핵 변수 때문에 자산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이 각광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같은 일부 부유층의 금 사재기가 유통 질서를 왜곡하고 탈세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뇌물 수단으로 전용될 가능성도 있다. 4월25일 현재 동네 금은방에서 순금 한 돈(3.75g)은 5만5천∼6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종로 귀금속 단지의 도매 가격은 5만2천8백원. 하지만 수억원어치를 한번에 구입하는 큰손일 경우 금값은 한 돈에 4만8천5백원 수준으로 떨어진다. 큰손이 주로 사는 1kg짜리 금괴의 경우 시세가 개당 1천4백8만원인데 큰손들에게는 1천3백만원대에 건네진다. 밀수 금이 전체 유통량의 70∼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국제 시세는 하나의 잣대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의 거래는 100% 현금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도 있다. 업자나 고객 모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물론 세금을 피하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간혹 검은돈을 세탁하려고 금을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만약 세금계산서를 끊거나 신용카드로 구입할 때는 수수료를 더 내야 한다. 통상 현금 거래에 비해 2∼3% 수수료가 붙는다.

큰손들은 일부 도매업자와 함께 작전을 펴기도 한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이들은 금을 사재기하며 가격을 띄웠다. 경기 지표를 분석해 가며 금이 오를 것이라고 집중 홍보했다. 일반인이 멋모르고 금 사재기에 뛰어들자 금값은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5만원대 초반에 형성되었던 금 도매가는 전쟁 발발 직전 가파르게 상승해 5만8천원을 넘나들었다. 소매점에서 금 한 돈은 6만5천원 선에서 팔려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금 도매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4천원 떨어진 5만4천원으로 곤두박질했다. 금 도매업자 이 아무개씨(54)는 “당시 금값을 의도적으로 밀어올리는 세력이 있었다. 시세 차익으로 하루에 3억원을 벌었느니, 5억원을 벌었느니 하는 큰손들이 있었다. 하지만 수천만원을 날렸다는 일반인이 셀 수 없이 많아 한동안 골목에 원성이 자자했다”라고 말했다. 이 작전 세력은 외환 위기로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할 때 금을 사재기해 막대한 차액을 남긴 전례가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금과 은을 사는 것이 투자의 한 전형으로 빠르게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우리 나라도 올해 부산선물거래소에 금 선물이 상장되고 은행에서 금궤를 사고 파는 골드뱅킹이 허용되면, 금 투자는 더욱 활성화할 전망이다. 불투명한 금 유통 구조를 정비해 큰손들이 장난할 여지를 봉쇄할 제도를 뿌리 내리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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