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사이로 ''막가는'' 삼성
  • 곽노연 방송대 교수·법학 ()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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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경제와 기업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삼성의 변칙 증여 같은 경제 범죄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있는 법질서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총수 일가에 대한 통모(通謀) 헐값 주식 발행은 얼마든지 현행법으로 근절할
지난 11월1일 국회 정무위는 허태학 삼성에버랜드 사장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삼성의 ‘변칙 증여’를 캐물었다. 신문 보도는 이 날 국회의원 18명이 삼성측의 ‘준비된 변명’ 앞에 속수무책이었다고 전한다. 삼성측은 3세 승계 과정이 ‘도덕적으로는 문제될지 몰라도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는 취지로 버텼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삼성 사안의 본질은 이건희 회장이 핵심 계열사 사장들을 시켜 아들인 재용씨에게 파격적인 헐값으로 계열사 주식을 특혜 발행해준 데 있다. 법학 교수들은 이 경우 핵심 계열사 사장들은 특별배임죄에, 이회장 본인은 특수교사죄에 해당한다는 분석을 내놓은 반면 삼성측은 법의 맹점을 피해간 것일 뿐이라고 펄쩍 뛴다. 어느 편이 옳은가?

비상장 기업이 신주를 발행할 경우 이사진은 전문 평가기관의 평가 결과나 내부 경영 자료를 토대로 적정가액을 책정한 후 원매인과 흥정에 들어가 가능한 최고가를 받아낼 법적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에버랜드나 SDS의 이사진은 달랐다. 이들은 이재용씨에게 각각 62.5%와 32.8%라는 지배 지분을 발행해 주면서도 전문 평가기관이자 자매 계열사인 삼성증권에 평가를 의뢰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은 기업 가치와 주식 가격을 정하는 데 필수인 주요 자산의 현재 가치와 기업 활동의 기대 수익도 추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사주에 대한 상속증여세법의 평가액을 계산해서 발행가로 삼았다.

상속증여세법에 따른 평가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에버랜드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에버랜드는 대차대조표 상의 자산 총액만 해도 1조원이 넘고 자산을 재평가할 경우 자산 총액이 최소한 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형 기업이다. 이런 에버랜드의 기업 가치는 상속증여세법에 따라 평가하면 1백50억원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에버랜드를 통째로 상속받아도 세법으로는 1백50억원을 상속받은 것으로 보고 상속세를 매길 뿐이다. 가진 자에게 유리한 ‘멍텅구리 세법’이라는 비아냥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세법상의 과세표준액 이상으로 비상장 주식을 매매·상속·증여하는 이상 국세청이 상속증여세를 물리기는 불가능하다. 재용씨에 대해 국세청이 쥐죽은 듯 침묵을 지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삼성측이 재용씨에 대해 주식을 발행하면서 과세표준액을 적용한 속셈도 같다. 그렇다. 공정 가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세법의 평가 방식은 정말 문제다. 이것이 삼성측이 말하는 법의 맹점이다. 하지만 법질서는 절대로 그렇게 맹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삼성 사안의 본질은 그룹의 핵심 경영진이 총수의 승계 의지와 지휘 감독에 따라 핵심 계열사 지분을 재용씨에게 초저가로 빼돌리기로 결의한 데 있다. 즉 회사와 주주에 대한 배임 고의를 실행한 데 있다. 시장 경제와 기업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와 같은 고전적인 경제 범죄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있는 법질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형법에도 엄연히 업무상배임죄가 규정되어 있건만 우리 상법은 특별히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이사의 특별배임죄라는 죄를 따로 마련해 놓고 있을 정도다. 따라서 총수 일가에 대한 통모(通謀) 헐값 주식 발행은 세법의 맹점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현행법으로 근절할 수 있다. 한마디로 권력과 금력에 눈 먼 것은 법질서가 아니라 사법 당국이다.

마침 검찰은 최근 우호 지분을 만들 목적으로 주변 인물에게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저가 발행해준 유일반도체 장성환 사장을 배임 혐의로 구속했다. 통모 불공정 발행이 형법상 배임죄를 구성한다는 법리를 검찰도 수용한 셈이다. 그렇다면 에버랜드와 SDS 사장은 물론 몸통 격인 이건희 회장도 배임 혐의로 구속해야 사리에 맞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혁의 칼이고 뭐고 좀 약한 사람들한테나 들이밀지, 삼성 같은 강자한테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이것이 국민의 정부이고 이것이 DJ노믹스인가”라고 질타한 한 시민의 이유 있는 항변에 대해 뭐라고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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