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주가 조작''드라마''전모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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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세종하이테크 작전 세력 적발… “몇 건 더 있다” 관측도
반도체 및 초박막 액정 표시 장치 부품을 생산하는 벤처 기업인 세종하이테크(세종)가 협력자와 처음 접촉한 것은 지난해 11월. 이 회사 최종식 사장은 이강우씨(한양증권 명동지점 부지점장)에게 은밀하게 제의했다. “코스닥 등록후 주가를 20만∼30만원(당시 액면가 5천원 적용) 선까지 끌어올려 달라.”

주가를 띄우려면 대량 매집이 가능한 펀드매니저가 제격. 올 1월 초 작전에 나선 이씨가 처음 ‘포섭한’ 펀드매니저는 대한투자신탁 백한욱·황보윤 차장. 이씨는 이들에게 4만주를 사주면 3억원을 주겠다며 유혹했다. 이씨는 1월23일부터 1월 말까지 펀드매니저 네 사람을 더 끌여들였다. 한국투신 임흥렬 차장, 국민은행 이종성 과장, 국은투신 심우성 과장, 삼성투신 이익순 과장(현 ㅌ자산운용과장)이 합류해 자못 화려한 진용이 꾸려졌다.

1월 말∼2월 중순 이씨에게는 최사장으로부터 골프 가방 3개가 전달되었다. 가방 한 개당 5억원씩 빳빳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이씨는 알선료와 3만주 매입 명목으로 6억원을 챙겼다. 나머지 9억원은 펀드매니저 6명에게 1억∼3억 원씩 전달했다. 중량급 펀드매니저 연루, 투신 신뢰에 먹칠

지난해 12월11일 공모가 5만원으로 코스닥에 입성한 세종은 등록 이후 13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해 주가가 21만5천5백원으로 급등했다. 하지만 1월 초순부터 신규 등록에 따른 이점이 사라지면서 큰 폭으로 주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펀드매니저 6명은 1월 말부터 화끈하게 주식을 사들였다. 작전에 동원된 주식은 15만~18만 주. 3월28일 장중 한때 32만9천원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4월 중순께 13만원대로 주저앉았다. 펀드매니저들은 ‘목말 타기(piggy back)’수법을 썼다. 시차를 두고 사들였다가 한꺼번에 대부분 판 것이다.

한 증권 전문가 표현을 빌리자면, 7월4일 서울지방검찰청 특수1부는 세종 사건을 그야말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았다.’ 검찰은 이씨를 소환해 거래소 상장 업체인 ㄷ사 사건을 조사하다가 예기치 않게 세종 사건을 접한 후 단 1~2주 만에 관련자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전원 구속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터트릴 것이 몇 건 더 있다”라고 귀띔했다. 세종 사건은 유력 투신사의 중량급 펀드매니저가 다수 연루되어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들은 고객의 돈을 성실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선관 의무’를 저버렸다. 겨우 회생할 기미를 보였던 투신업계의 신뢰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엄밀히 말해 ‘세종 사건’에 대해서는 증권거래법이 규정하고 있는 주가 조작, 이른바 시세 조정 혐의를 아직 적용할 수는 없다. 현재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적용한 것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 대주주와 브로커·펀드매니저 사이에 돈을 주고받은 증재 및 수재 사건이다.

증권거래법상 시세 조정(188조4항)이 되려면 작전 세력이 인위적으로 호가나 거래량에 변화를 주어 현재 시세가 저평가(혹은 고평가)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계략이나 술책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에 관해 이 사건 담당 검사인 서울지검 지익상 검사는 “증권거래법 위반 등 여죄를 밝히기 위해 금융감독원에 조사를 의뢰했다”라고 밝혔다. 세종 사건은 금감원 조사 후에 검찰이 수사하는 일반적인 절차와는 거꾸로 진행되는 셈. 하지만 증권 전문가들은 현재로도 이 사건을 주가 조작 사건의 범주로 넣는 데 무리가 없다고 보고 있다. 명백히 주가를 띄울 목적으로 대주주와 증권 관계자들이 공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 사건 관계자들은 주가를 조작해 어떤 이득을 얻었을까. 우선 대주주인 최종식 사장은 지분을 26.9%(특수 관계인 지분을 합치면 47.54%) 갖고 있지만, 주가 급등기에 한 주도 팔지 못했다. 6개월 동안 지분을 팔지 못하는 대주주 예수 보호 조항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권 전문가들은 최사장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차명 계좌를 동원해 틀림없이 엄청난 시세 차익을 챙겼을 것이라고 본다. 이강우씨나 펀드매니저 6명 역시 뇌물뿐 아니라 딴 주머니를 동원해 이득을 얻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주식 투자를 할 수 없는 펀드매니저·브로커·애널리스트 들이 차명으로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증권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제로섬 게임인 주식 시장에서 이득을 얻은 세력이 있다면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주가 조작 사건이 자본 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로 치부되는 이유는, 작전 세력이 불특정 다수의 호주머니로부터 돈을 도둑질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증권 전문 사이트인 애널스톡(www.analstock.co.kr)에 따르면, 세종 사건으로 인한 직접 투자 피해자가 4천여명, 피해 규모는 2백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가 조작 행위는 한국 증시의 암적 존재이다. 한국 증시에서 작전 세력이 암약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갈수록 지능적인 신종 작전이 횡행하고 있다. 상장한 회사 주가를 어떤 세력이 고가 허수 주문 등으로 띄워 올리는 것은 이미 고전적 수법. 지난해부터는 시장에 등록(상장)하기 전부터 ‘공모(共謀)를 통해 공모(公募) 가격을 부풀리는 행위’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한 창업투자회사 관계자는 “프리코스닥 상태에서 브로커와 주가를 띄우려고 모의하는 행위는 특별한 축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귀띔했다. 주가 뻥튀기의 피해자가 순진한 엔젤 투자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99년 시세 조정 혐의를 31건(1998년 27건) 적발한 금융감독원은 올 5월 말 현재 20건을 적발해 지난해 수준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신동방·미래와사람·세우포리머·선도전기·에넥스 등과 최근 흥창에 이르기까지 주가 조작은 꼬리를 물었지만,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적발될 확률이 워낙 낮은 데다가 ‘재수 없이’걸려도 그다지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증권거래법상 시세 조정 행위에는 최고 10년 이하 징역과 2천만원 이하 벌금형이 부과되지만, 미국보다 훨씬 관대한 최고 형량조차도 그대로 부과되는 일은 거의 없다. 경제적 파산은 물론 작전 연루자가 영원히 증권 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미국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것이다. 지난해 온통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던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역시 ‘주범’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집행 유예로 풀려났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시세 조종, 미공개 정보 활용 같은 불공정 행위는 그 위험성에 비해 기대 수익률이 높은 게임이다(한국증권연구원 우영호 부원장). “작전 뿌리 뽑으려면 집단소송제 도입하라”

주가 조작이 횡행하는 것은 우선 적발하는 손길이 느슨한 탓이다. 거래소 상장 종목보다 코스닥 종목에서 훨씬 작전 세력이 활개를 치는 것은 거래소보다 감리 시스템이 헐겁기 때문이다. 코스닥 시장은 8월께 감리 시스템을 거래소 수준으로 강화한다고 밝혔지만, 얼마나 위력을 보일지는 의문이다.

조사나 수사 절차가 다단계로 복잡한 것도 작전 세력에게는 빠져 나갈 구멍을 넓게 한다. 증권거래소나 증권업협회가 최초 감리를 한 후 금감원에 넘기고 금감원은 또 빨라야 몇 개월 뒤 검찰에 넘기는 현행 절차에서는 작전 종료후 1년이 훌쩍 지나기 일쑤다. 이 때 작전 세력은 설거지(이익 분배)까지 깨끗이 끝낸 지 오래다. 검찰에서도 진행은 매우 더디다. 현재 검찰에 계류된 사건만도 100여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 사건 피해자들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동안 사법부가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해 보수적 판단을 내려온 점을 감안할 때 승소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론도 일고 있다. 지난 4월 있었던 대한방직 손해배상소송 1심이 좋은 예. 서울지법 민사21부는 LG화재·제일은행 등의 펀드매니저들이 1997년 주가를 끌어올린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이후 주가 하락과 투자자들의 손해가 작전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우선 감독 당국이 집요하게 파헤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법부도 전향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한누리법무법인 김주영 변호사는 “작전 세력을 발본색원하려면 집단소송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피해자 한 사람이 승소해도 같은 사건의 모든 피해자가 구제받을 수 있게 된다면, 기대 이익과 경제적 징벌을 비교한 작전 세력들이 크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단소송법은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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