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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원 인사가 ‘대폭’인 까닭

대기업 임원 인사 유례없는 ‘대폭’… 경영진 세대 교체에 성과주의·감량 경영 맞물려

金芳熙 기자 ㅣ | 승인 1997.01.0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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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신입 사원 면접 때 직접 참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지원자의 관상을 자기가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대신 이렇게 어렵게 선발된‘삼성맨’은 대과가 없는 한 장수를 보장 받았다.

93년 신경영 선언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건희 현 회장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독특한 인사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파격 인사. 기존 관념과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영자는 과감하게 정리하는 대신, 창의적인 인물은 역시 과감하게 중용한다.

지난 12월18일 단행된 사장단 인사에서도 예의 파격이 다시 벌어졌다. 선대 회장 시절부터 경영에 참여해온 원로·중진 경영진을 대거 퇴진시키고 부사장이나 전무급 젊은 경영자들을 각 계열사 대표 이사로 발탁했다. 김광호 전자소그룹장 겸 삼성전자 대표 이사 부회장과 이필곤 삼성물산 대표 이사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는 대신 각각 미주 본사와 중국 본사의 대표 이사로 물러났다.

회사의 공식 설명은 최고 경영진을 영업 일선에서 뛰게 하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는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들 외에도 사장급 이상 고위 경영자 6명이 상담역으로 물러났다. 반면 사장단 인사의 규모에서 매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은 40대 후반~50대 초반인 부사장과 전무급을 과감히 사장으로 승진시키기도 했다. 현대, 정몽구 회장 색깔 처음 드러날 듯

이회장의 인사 기준은 경영 실적 못지않게 자기 경영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삼성그룹 임원들은 이회장이 제품이나 경영 관리에 대한 지식이 많은 대신 말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입을 닫고 지내는 편이어서, 선대 회장보다 속을 헤아리기가 더 어렵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아직 인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도 올해는 자기 색깔을 드러낼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정주영 명예 회장이 아직 그룹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은 상황이어서, 자기 구도대로만 밀어붙일 수는 없다. 더욱이 지난해 두 번의 비정기 사장단 인사는 전적으로 정 명예 회장 작품이라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다.

정 명예 회장은 주력 계열사 사장들을 거의 바꾸지 않았으며, 비서실과 그룹 종합기획실 출신들도 일일이 챙길 정도로, 한 번 신임하면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다. 정몽구 회장도 인사 스타일이 아버지와 비슷할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96년 4월 현대강관 사장 경질 사건으로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당시 정회장은 울산에 냉연강판 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이 본사 앞에 몰려와 데모를 하는 등 물의가 일자 현대강관 사장을 전격 경질해 화제가 되었다. 따라서 올해 정기 인사가 정몽구 회장의 인사 스타일을 가름할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상당수 그룹의 인사가 사상 최대 규모가 된 것은 2세 경영자들이 본격적으로 경영진의 세대 교체를 이루려 했다는 점 외에도 대부분 그룹의 경영 실적이 부진해 감량 경영이 불가피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지난 12월12일 단행된 쌍용그룹의 인사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주요 계열사 사장단이 모두 교체된 이번 인사에서는 형의 뒤를 이어 취임한 김석준 회장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는 점말고도, 날로 커져가는 그룹 적자 폭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단 신임한 사람은 끝까지 밀어주는 창업주들의 인사 스타일을 여전히 유지해온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이 올해 역시 비슷한 기조를 유지할지도 관심 사항이다. 선경인더스트리 직원 3분의 1 가량을 명예 퇴직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해 충격을 주었던 선경그룹은 모기업인 (주)선경 임원들 역시 3분의 1 가량 줄인다는 소문이 무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현재는 86명). 웬만해서는 잘 바꾸지 않고 공채 기수 순에 따라 인사하는 최회장의 스타일은 측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두드러진다.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손길승 부회장은 이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17년 넘게 그룹 경영계획팀을 이끌어 온 국내 최장수 기조실장이다. 또 다른 측근인 김항덕 부회장은 80년 유공을 인수할 때 (주)선경 상무에서 유공 수석 부사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이것이 최회장의 최대 파격 인사로 꼽힐 정도다. 실제로 최회장은 공·사석에서 두 부회장을 부하가 아니라 사업 동기라고 말할 정도로 신뢰한다.회장 주변 관리자보다 ‘일선 사령관’ 중용

예상 밖의 파격 인사가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질 곳으로는 이들 외에도 코오롱그룹을 들 수 있다. 당초 코오롱그룹은 이웅렬 회장이 취임한 후에도 책임 경영과 자율 경영을 강조해온 터여서 지난 한 해 경영 성적이 안좋다고 해서 당장 책임을 묻는 대폭 인사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적어도 인사 스타일에서는 아버지인 이동찬 명예 회장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라던 이런 예상은 지난 12월10일 인사안이 발표되면서 여지 없이 깨졌다. 이회장은 취임 후 처음 실시한 그 인사에서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대표 이사 4명을 승진시키거나 전보했다. 인사 대상 임원만도 모두 61명에 이르는 창사 이래 최대 규모 인사였다.

각 그룹의 임원 인사 폭이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는 것은, 그룹들이 과거의 연공서열형 인사에서 벗어나 능력주의나 성과주의를 도입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선경·금호·코오롱 그룹이 능력급제나 연봉제를 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다른 그룹들도 대부분 이를 도입할 태세다. LG그룹은 모든 임원의 실적을 계량화해 평가하는 등 성과주의 도입에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 구본무 회장은 파격을 싫어했던 구자경 명예 회장과 달리, 취임 이후부터 왕성하게 신사업을 추진하면서 성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그는 11월26일 열린 사장단회의에서도 정기 임원 인사에 대해 말하면서 “올해 정기 인사는 업적과 능력에 따른 성과주의에 입각해 실시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연공서열형보다는 서구적인 기준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구회장의 서구 취향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가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 회장인 잭 웰치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11월26일의 사장단회의에서 구회장은 발탁 인사에 대해서도 단지 조기 승진이나 보상 승진 차원이 아니라 군계일학을 가린다는 차원에서 파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시했다. 실제로 지난 12월9일 실시된 LG그룹 사장단 및 임원 인사는 그의 말이 빈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임원 21명이 조기 승진했는가 하면 5명은 두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하기도 했다. 그룹 내에서는 96년 6월 개인휴대통신(PCS) 사업권 획득에 기여한 인물들과 ‘사랑해요, LG’라는 구호로 그룹 이미지를 높인 LG애드사 관계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평이다. 90년대 초반부터 LG그룹의 경영 혁신을 주도해온 미국의 컨설팅(경영 상담)사인 맥킨지사에서 아예 LG로 직장을 옮긴 이들도 구회장 사람으로 자리를 굳혀 가는 형국이다.

재벌 총수나 회사의 처지에서 보면 능력이나 실적을 중시하는 인사 시스템에서는 실적이 나쁜 경영자들을 퇴진시키거나 뛰어난 능력이나 성과를 보여준 사람들을 발탁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다 보면 몇몇 인사가 중용되고 나머지 상당수가 퇴진하는 양태를 띠기 마련이다.

발탁 임원의 양상도 크게 변화하는 추세다. 과거처럼 회장 주변에서 머무르는 관리자들보다는 계열사에서 경영 혁신이나 기술 개발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준 젊고 공격적인 경영자가 중용되는 경향이 있다. 다른 그룹 인사의 근거가 되곤 하는 삼성그룹의 발탁 인사가 좋은 예다. 이 인사에서 진대제 삼성전자 부사장(44)이 부사장 승진 1년 만에 사장이 되었고, 허태학 중앙개발 전무(52) 역시 두 단계를 뛰어넘어 사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2백56메가D램 개발과 경영 혁신의 공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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