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시평]부패 예방엔 '시장원리'가 명약
  • 孔柄淏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 승인 1995.11.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우리는 힘센 아이의 등쌀에 주눅 들었던 적이 있었다. “너 죽을래, 아니면 내놓을래!”라는 엄포에 기가 죽어 지내던 조무래기 시절은 이문열씨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잘 그려져 있다.

노태우씨의 비자금 사건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힘 없는 민초들과 권력을 쥔 사람들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맡긴 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재물을 축재한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노만으로 이번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왜 이같은 일이 발생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차분히 생각해야 할 때이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될 때, 그리고 견제 기능이 충분치 않을 때 어느 나라에나 부패라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권력의 집중은 인·허가권과 같은 각종 규제나 공천권 같은 독점적인 권한으로 드러나게 된다. 규제와 같은 독점권은 다양한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공익이나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을 면밀히 따져 보면, 규제 권한을 쥔 사람들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입법부나 행정부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가보다 더 공익을 생각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은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정부 탓이요, 물가가 오르는 것도 정부 탓이라는 이른바 ‘정부 신화’에 사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치가나 관리 역시 기업가처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력 투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기에 공공선택학파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은 정치가를 ‘정치적 기업가’라고, 관료를 ‘관료적 기업가’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행정부 역시 최대의 이익 단체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어디 노태우씨만 비난 받아야 하겠는가. 정당화될 수 없는 막대한 공짜 돈 즉, 렌트(rent)를 향유하고 살아온 사람은 야당과 여당을 불문하고 권력층 주변 사람들에게 드물지 않은 것이 현실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흔히 규제 완화나 민영화, 그리고 작은 정부를 내세우며 정치 권력을 시장 권력으로 돌려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들을 기업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원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리자는 주장은 어느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이 적은 세금을 내면서 더 알찬 서비스를 누리겠다는 일종의 권리 선언이다.

노씨 비자금 사건도 따지고 보면 시장경제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은 나라를 옮겨 다닐 능력을 타고나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법을 만드는 사람들과 집행하는 사람들의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치가나 관료 들이 전횡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자릿세와 같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면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이 나라를 떠나든지 아니면 자릿세를 내고 사업을 계속하든지. 민초들의 대부분은 자릿세를 내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형태의 부패 행위에도 준엄한 법의 심판을

그렇다면 부패를 막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것은 권력의 집중을 막고 인치(人治)보다는 법치(法治)의 기틀을 이 나라에 세워 가는 일이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나 부동산실명제와 같은 개혁 입법들의 기초를 천천히 하나씩 닦아 가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발생하면 개혁이건 개선이건 제도 변화에 완강히 저항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정치가들은 제도 개혁에 쉽게 손댈 수 없다. 한편에서는 이 정부가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라도 제도 개선을 이루었기에 이번 사건도 잡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일고 있다.

우리 사회를 흔히 부패의 정도가 심한 지대 추구 사회라 부른다. 하지만 부패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는 제도 개선에도 공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 곳곳에 시장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 개선 못지 않게 부패에 대한 ‘사회적 규범(social norm)’을 만들어 가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 앞으로 권력형 부패가 어떻게 처리될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번 사건의 처리 결과가 주목된다. 누구든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떤 형태의 부패 행위도 엄정한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규범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