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에 옮겨붙은 엔론의 부실 '불똥'
  • 이문환 (lazyfair@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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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5’ 회계법인 좌초 위기…“한국에서 으스대더니…”
1997년 말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가장 재미를 본 곳이 외국 컨설팅 업체와 회계법인들이다. 이들은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선진 기법을 무기로 한국 정부와 기업의 구조 조정 업무를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상당한 이익을 거두었다. 특히 이 시기에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 등 이른바 ‘빅 5’로 불리는 외국 회계법인들은 한국 회계 시장을 사실상 접수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를 받은 정부가 해외에 나가는 금융 기관의 감사 보고서에는 외국 회계 법인의 이름을 반드시 박도록 하고, 국내 법인에게는 외국 법인과 짝짓기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최대 에너지 업체인 엔론이 분식 회계로 우량 기업인 것처럼 행세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국 회계법인들이 내세웠던 선진 기법도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엔론의 회계감사인은 ‘빅5’ 중 하나인 아서 앤더슨. 현재 앤더슨은 회계 감사를 엉터리로 했거나 분식 회계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혐의를 받고 미국 법무부·의회·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동시에 조사를 받고 있다.



앤더슨 미국 본사는 위기 관리 컨설팅 업체에 자문까지 해가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앤더슨’이라는 이름은 큰 상처를 입었다. 국내에서도 앤더슨과 거래 관계를 맺고 있는 업체들은 엔론 사태가 어떻게 확대될지를 주시하고 있다. 앤더슨의 한국 지사 격인 안진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는 업체들은 일단 두고 보자는 분위기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아서 앤더슨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보고 대우그룹 해외 채권 회수를 위해 위임 계약을 체결하려던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엔론 사태의 추이에 따라 계약 체결 여부를 재심의하기로 했다.



한국 고객들 “일단 두고 보자”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97∼2001년에 엔론은 부채 비율을 높이지 않고 돈을 빌리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를 설립하는 수법을 썼다. 가공 회사를 통해 돈을 빌려 쓰고 이를 자사의 장부에 남기지 않는 수법이다. 그러면서도 엔론은 가공 회사가 지급 이자로 지불한 비용을 자사가 지출한 것으로 처리해 세금을 공제받는 ‘세테크’ 기술을 발휘했다. 엔론은 이들 가공 회사에 건넨 돈을 매출액으로 잡아 수입을 부풀리기도 했다. 또한 1997년 엔론이 감사 보고서에 순이익을 실제보다 2배 가까이 높은 1억5백만 달러로 잡았지만 앤더슨은 그대로 보아 넘겼다. 총매출액에 비하면 큰 액수를 부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1월17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이미 앤더슨 경영진은 엔론의 부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엔론과 계속 거래할지를 심각하게 논의했다고 한다. 지난해 매출액이 94억 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회계법인인 앤더슨이 엔론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 것은 그만큼 앤더슨의 수입에서 엔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국내의 한 회계법인 임원은 “앤더슨이 위험을 감수하고 수익성을 좇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봐야 한다”라고 평했다. 미국 회계법인도 막대한 돈이 걸려 있다면 부실 감사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외국 법인들은 각국 회계법인과 제휴하는 것보다 ‘하나의 회사’로 통합하는 것을 추구하는 쪽이다. 이미 안진회계법인은 앤더슨과 하나로 통합된 상태이다. 현재 언스트&영과 통합 작업을 벌이고 있는 영화회계법인도 2005년까지는 완전히 작업을 마칠 예정이다. 통합하면 국가 별로 정보를 공유하고 홍보·관리 부문에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국내 회계법인들은 경영권을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사 소통은 영어로 해야 하고, 국내 법인의 수입·지출을 미국 본사가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합에 불만을 품고 있는 회계사들도 적지 않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임원은 통합이 자주성을 완전히 빼앗기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통합 과정에서 국내외 법인 간에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미 안건회계법인과 제휴 관계인 딜로이트 투시 & 토머스는 지난해 11월 하나회계법인과 또 제휴 계약을 맺었다. 외국 회계법인이 한 나라에 제휴 법인을 둘씩이나 두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안건측 회계사 중에서 통합 반대파가 나오자 딜로이트측이 새로운 파트너로 하나회계법인을 택했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 업계 관계자들은 제휴 기간이 끝나는 5월에 딜로이트가 안건과 완전히 갈라설 것으로 본다. 그럴 경우 안건은 중소 회계법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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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에서는 앤더슨이 ‘빅5’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분위기다. 우선 앤더슨은 회계법인의 생명인 신뢰성을 잃었다. 지난 5년 동안 앤더슨은 부실 감사 문제로 여러 차례 벌금을 냈다. 지난해 앤더슨은 폐기물 처리업체 ‘웨이스트 매니지먼트’에 대한 회계 감사를 잘못해서 회계법인에 부과된 벌금으로는 사상 최대인 7백만 달러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냈다. 전기기구 제조업체인 ‘선빔’에 대한 회계감사에 문제가 생기자 앤더슨은 선빔 주주들에게 합의금 1억1천만 달러를 주고 소송을 막았다. 엔론에 대한 부실 감사 문제로 앤더슨이 물어야 할 배상금은 그보다 훨씬 큰 액수가 될 전망이다. 1월28일자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엔론 본사가 있는 휴스턴 지역의 한 헤드헌터에게 이미 앤더슨 관계자들의 이력서가 천 통 가량 들어갔다고 한다.



결국 앤더슨은 1~2년 내로 다른 회계법인에 합병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미국 현지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미국에서 ‘빅5’ 체제가 ‘빅4’ 체제로 재편된다면 한국 업계도 마찬가지로 4강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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