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은 간 데 없고 오명만 남아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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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 회계 관련된 외국계 기업들, 사업 축소·지분 매각 ‘고난의 세월’



해마다 취업 시즌이 되면, 주요 대학 캠퍼스에는 ‘아서앤더슨 입사 설명회’ 플래카드가 목 좋은 자리에 크게 내걸렸다. 설명회는 이른바 빅3 대학에서만 열렸고, 대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이 회사에 선망 어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옛 풍경이 될 듯하다. 미국 아서앤더슨이 회계 부정 사태로 몰락하면서 한국 아서앤더슨그룹도 그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국 아서앤더슨그룹이 있던 서울 여의도 한화증권빌딩에서는 간판 바꾸어 달기가 한창이다. 13층부터 19층까지 쓰는 안진회계법인은 입구를 새 파트너인 딜로이트투시토마츠(DTT) 간판으로 도배했다. 두 달 전까지 이곳은 아서앤더슨 간판으로 가득 찼던 곳이다. 12층 아서앤더슨 코리아 사무실 입구에는 아서앤더슨의 간판과 경쟁사인 KPMG의 간판이 같이 붙어 있다. 아서앤더슨코리아의 조세 부문을 KPMG 컨설팅이 인수했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간판을 바꿔야 하는데 아서앤더슨 간판을 미처 못 떼냈다”라고 설명한다. 다른 직원들도 지금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다고 말했다. 11층에는 아직 아서앤더슨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쪽은 딜로이트투시토마츠컨설팅이 인수할 예정이다. 이처럼 한국 아서앤더슨은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고 있다. 현재 일본 아서앤더슨은 KPMG로, 중국 아서앤더슨은 PWC로 넘어갔다.


안진회계법인의 한 간부는 “처음에는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지만, 파트너를 딜로이트로 교체하면서 상당 부분 극복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요 고객을 놓친 것도 사실이다. 우선 포스코 같은 큰 고객이 삼일회계법인으로 옮겼다. 안진회계법인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고객 가운데는 SK엔론도 있다. SK엔론은 회계법인을 삼정KPMG로 바꾸었다.


SK엔론은 SK(주)와 엔론이 각각 50 대 50을 투자해 만든 회사로서, SK가스와 부산도시가스 등 11개 가스 자회사를 거느린 지주회사다. SK엔론 역시 미국 엔론 사가 부도 난 뒤 운영에 타격을 받고 있다. 여의도 63빌딩에 있는 SK엔론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조재수 사장과 대럴 킨더 사장은 여전히 공동 대표로 있다. 엔론과 무관하게 실질적으로 SK가스가 운영하는 자회사들은 예전처럼 굴러가고 있다.


하지만 업계 사람들은 SK엔론이 지주회사로서 가지는 고유한 기능은 삐걱거리고 있다고 말한다. SK엔론은 SK그룹이 에너지 관련 공기업(한국전력·한국가스공사)을 인수하기 위해 만든 야심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SK엔론이 인수전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컨소시엄 구성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당초 계획은 SK엔론이 주축이 되어 외국계 회사와 한국 재벌의 자본을 모으는 것이었다.

한 관계자는 “SK엔론의 기능이 마비되자 SK(주)가 그 역할을 떠맡은 것으로 안다. 최근 SK가 SKT 주식을 팔아 현금 16억8천만 달러(약 2조원)를 확보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SK그룹측은 SKT 주식을 판 자금으로 부채를 갚고 나면 5천억원밖에 남지 않아 이 돈으로 민영화 사업을 주도하기는 무리라고 반박했다.


에너지 분야 외국계 회사, 줄줄이 추문





SK엔론에서 일하는 엔론 파견 직원은 5명에서 3명으로 줄어들었다. 엔론은 SK엔론에 2억4천만 달러(약 3천억원)를 투자했는데, 지분 매각 작업을 벌이는 중이다. 한때 벨기에의 트랙터벨 등이 인수에 관심을 보였지만, 최근 에너지 파란 때문에 협상이 쉽지 않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대주주 교체기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청산 작업이 끝나야 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다.


현재 국내 에너지 분야는 분식 회계 사태 홍역을 가장 심하게 겪고 있다. 엔론을 비롯해 엘파소·미란트 등 내로라 하는 에너지 회사들이 모두 분식 회계에 연루되어 있다. 이 기업들은 얼마 전까지 한국의 공기업 민영화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미란트는 현대에너지 지분을 100% 가진 회사인데, 머지 않아 지분을 팔고 한국에서 철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비벤디그룹처럼 분식 회계 파장이 크지 않은 곳도 있다. 서울 충정로에 있는 비벤디워터코리아 박혜지 과장은 “비벤디그룹은 크게 커뮤니케이션그룹과 환경그룹으로 나뉜다. 프랑스 비벤디 사태는 환경그룹 문제가 아닌 커뮤니케이션그룹(비벤디유니버설) 문제로 안다”라고 말했다. 현재 비벤디그룹은 비벤디워터 지분을 63% 가지고 있는데, 곧 50% 미만으로 낮출 것으로 보인다.


이름 같은 회사 직원들 “피곤해 못살겠다”


미국 회계 부정 사건으로 엉뚱한 오해를 받는 외국계 기업들도 있다. 미국 제약회사 머크가 분식 회계로 고발당하면서 한국 머크도 덩달아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두 회사는 전혀 다른 회사다. 미국 머크의 자회사가 MSD코리아인 반면, 한국 머크는 독일에 본부를 둔 머크 사의 자회사다. 한국 머크의 정수경씨는 “문의 전화가 몰려 온다. 한번은 우리 회사 담당 회계법인이 전화를 걸어와 ‘너희 왜 그런 일을 했냐’고 항의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회계 업무를 대신 해 주겠다는 제의도 몇 군데 있었다. 한국 머크 황창용 과장은 “사람들이 하도 질문을 많이 해서 아예 해명서를 프린트해 가지고 다닌다. 이야기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아서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예로 후지제록스도 있다. 후지제록스는 일본 후지가 75%를, 미국 제록스가 25%를 투자한 회사다. 최근 미국 제록스가 회계 부정에 연루되면서 후지제록스도 구설에 올랐다. 후지제록스코리아 윤도용 실장은 “3억원짜리 기계를 도입하기로 한 고객이 미국 제록스가 문제 있다는 보도를 보고 계약 취소를 알려왔다. 미국 제록스와 후지제록스는 별 상관이 없는 기업이라고 한참 설명해 겨우 마음을 돌려 놓았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회계 부정 의혹을 받고 있는 GE와 마이크로소프트는 회사 규모에 비해 사건 규모가 작아서인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아무튼 이번 분식 회계 파동으로 국내에서도 ‘외국 기업은 무조건 안전하다’는 신화가 깨어지고 있다. 스타일을 단단히 구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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