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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함대’ 은행, 금융 천하 제패하나

정부 엄호 받으며 보험·증권업까지 ‘싹쓸이’

이진수 기자 ㅣ jslee@sisapress.com | 승인 2004.09.21(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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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무한 확장하고 있다. 국내 금융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기조를 등에 업고 보험·증권·카드 부문 자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투자신탁과 할부금융 업무까지 넘보고 있다. 은행은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영업점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는 강점을 활용해 진출하는 업종마다 중소 업체들을 초토화하고 있다. 경험이 없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새로운 분야는 외국 금융회사나 국내 시장 선두 업체와 손잡고 합작회사를 세우거나 제휴 마케팅을 벌여 시장 진입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소 금융업체들은 퇴출 위기에까지 몰리고 있다.

정부는 은행의 일방 독주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하고 있다. 국내 금융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겸업화와 개방이 필수이며 국내 은행의 덩지를 키워야 세계 굴지의 금융기관과 경쟁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계 금융 시장 환경 변화도 변신을 부추기고 있다. 예금과 대출만으로는 은행이 살아 남기 힘들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발달하면서 예대 마진(대출 수입에서 예금 이자를 뺀 이윤 폭)이 크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이 금융산업의 판매 아울렛이나 금융 서비스의 허브와 같은 종합 금융기관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생존이 힘들어진 것이다.

보험모집인들 “우리 밥줄 끊을 셈인가”

국내 은행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국내 최대 금융기관인 국민은행은 지난해 2월 한일생명을 인수해 보험업에 뛰어들었다. 또 최대 주주인 ING그룹과 방카슈랑스 영업을 위한 합작 계약을 맺었고 JP모건과도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한 제휴를 모색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이미 자산 운용, 창업 투자, 부동산 신탁, 선물 분야를 포함해 관계사 10여 곳을 거느린 초대형 복합금융회사 면모를 갖추었다.

우리금융지주는 지난 9월10일 LG증권을 인수하기로 산업은행과 최종 합의했다. 우리금융은 올해 LG증권·우리증권과 합병해 증권업계 선두로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우리금융지주는 또 내년 4월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을 앞두고 삼성생명과 방카슈랑스 전문 업체를 설립하기 위해 협상하고 있다. 우리금융은 우리은행을 주축으로 카드·증권·투자신탁·보험을 아우른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신한금융지주도 2002년 프랑스 BNP파리바 금융그룹과 5 대 5 합작으로 신한BNP파리바투신운용과 SHNC생명보험을 설립했다. 또 내년 조흥은행 카드 부문과 신한카드를 합병하고 신한생명보험도 자회사로 편입할 계획이다. 하나은행과 동원금융은 각각 대한투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은행이 파죽지세로 뻗어나가자 기존 금융업종 종사자 가운데 보험모집인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보험모집인 7천명은 지난 9월14일 국회의사당 건너편 국민은행 정문에 집결해 내년 4월 시행 예정인 방카슈랑스 2단계 계획을 철회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지난해 8월 시행된 방카슈랑스 1단계의 폐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2단계가 실시되면 보험모집인 26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방카슈랑스는 은행이나 보험사가 다른 금융 부문의 판매 채널을 이용해 자사 상품을 판매하는 마케팅 전략으로 프랑스어 은행(Banque)과 보험(assurance)의 합성어다. 보험회사가 은행 지점을 보험 상품 판매 대리점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은행이 수수료를 받고 보험 상품을 파는 영업 행태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8월 방카슈랑스 1단계가 도입되어 저축성 보험 상품에 한해 은행에서 판매할 수 있게 했다.

방카슈랑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방카슈랑스는 도입된 지 6개월 만에 보험 상품 시장의 65% 가량을 차지했다. 생명보험업계는 지난 1년 동안 방카슈랑스를 통해 판매된 1년치 보험이 47만2천5백 건이고 초회 보험료는 3조1천5백45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덕분에 보험산업은 40%가 넘게 성장했다.

그러나 김소섭 손해보험협회 회장은 “(방카슈랑스 1단계 시행 과정에서) 은행은 현행 법규가 보장한 우월적인 지위를 악용해 보험회사와 소비자 양자에게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고 소비자에게는 대출 조건으로 보험을 들라고 하는 ‘꺾기’를 강요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6월 보험회사 11 곳과 은행 대리점 9 곳의 방카슈랑스 운영 실태를 점검한 결과, 은행의 교섭력 우위에 따른 불공정한 제휴 계약과 은행 창구 직원의 업무 미숙으로 불완전 보험 판매 행태가 밝혀진 적이 있다. “은행 선진화 공감하지만 공정성에는 문제”

방카슈랑스 2단계가 실시되면 자동차보험과 보장성 보험을 은행 창구를 통해 판매할 수 있다. 중소 보험업체에게 방카슈랑스 2단계 조처는 재앙에 가깝다. 손해보험업계는 자동차보험이 전체 매출의 절반에 가깝기 때문에 은행에 자동차보험을 개방하면 중소형 회사들은 살아 남기 힘들다. 이로 인해 보험모집인들이 대량 실업자로 전락해 사회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박조수 손해보험노동조합 위원장은 “외국 자본이 잠식한 은행의 배를 불리자고 26만 설계사의 밥줄을 끊겠다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재정경제부는 방카슈랑스 2단계 조처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 금융산업 경쟁력이 취약한 것을 감안해 은행을 대형화하고 종합금융서비스 업체로 키우려면 금융 산업 구조 조정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행 대형화와 종합화라는 정책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정책 시행 과정에서 공정성을 잃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행 법규는 은행이 보험·증권·투신 등 모든 금융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나 다른 금융 업종들이 은행 업종에 진입할 길은 막아놓았다.

금융산업 전문가들은 정부가 은행을 편애하는 이유를 공적자금 회수에서 찾는다. 금융권 구조 조정 과정에서 은행에 들어간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은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금융산업의 균형 발전보다는 공적자금 회수에만 정책 기조를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산업 자본이 금융 자본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국내 금융산업은 은행을 제외하면 재벌 계열사들이 시장 선두 업체들이다. 보험·증권·카드 업체들에게 문을 열어주면 자본력과 브랜드 인지도를 갖춘 대기업 계열사들이 앞다투어 은행업에 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보험사나 증권사가 은행 업무를 할 수 있게 하면 산업 자본이 금융 자본을 장악할 길을 열어주어 특혜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대형 은행들은 외국 자본이 대주주이다. 외국 자본은 국내 은행을 인수하거나 은행을 설립해 은행업에 진출할 수 있는 데 견주어 국내 산업 자본은 은행업에 진출할 수 없다.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정책실장은 “정체가 불분명한 외국 자본이 국내 자본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폐해가 크다. 멕시코나 동유럽 자본 시장을 외국 자본이 장악하면서 해당 국가가 경기 변화에 따른 위기 대응 능력이 크게 떨어진 것을 유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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