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 신호철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9.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만원만 주면 ‘휴대전화 불법 복제→타인의 위치 정보 추적’ 가능
강원도 원주시 단계동은 윤락업소가 몰려 있는 유흥가로 유명하다. 올해 24세인 박 아무개씨는 이곳의 한 룸살롱에서 일하다가 지난 7월 말 탈출했다. 가까스로 원주를 벗어난 그녀는 경기도 여주까지 도망쳤다. 설마 거기까지 포주들이 잡으러 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고 안심했다. 그러나 8월 초, 그녀는 또다시 포주에게 붙잡혀서 원주 룸살롱으로 되돌아갔다.
최근 원주 일대 유흥가를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간 여성은 박씨뿐만이 아니다. 원주 시내 한 다방에서 일하다 지난 3월 전주로 도망쳤던 한 여성도 전주 시내를 배회하다가 업소 주인 장 아무개씨(45)에게 잡혀 원주로 되돌아갔다. 장씨를 비롯해 원주 일대 유흥업소 사장들은 마치 천리안을 가진 듯 도망친 여자들을 척척 잡아들였다.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그들의 천리안은 바로 휴대전화다.

9월25일 춘천지방검찰청 원주지청은 휴대전화를 불법 복제한 뒤 이를 이용해 타인의 위치 정보를 추적해온 조직을 적발했다. 심부름센터(또는 흥신소)와 휴대전화 대리점이 가담한 이 조직의 활동 무대는 전국을 망라했다. 이들 조직에게 건당 30만∼50만 원을 주며 추적을 부탁한 의뢰인들은 주로 유흥업소 사장이었다. 휴대전화 판매업자 전 아무개씨의 장부에 따르면, 복제 건수는 2002년 11월 이래 무려 천여 건에 달했다. 한달에 100개꼴로 휴대전화를 복제하고 위치를 추적한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휴대전화 위치 정보 서비스를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사건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위치 정보는 인공위성과 지상 기지국을 이용해 가입자의 실시간 위치를 인터넷과 휴대전화 단말기를 통해 알려주는 서비스다. 처음에는 자신의 위치만 알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위치 정보 제공에 동의한 친구의 위치도 알 수 있다. 휴대전화 액정 화면으로도 볼 수 있고, 인터넷으로도 조회할 수 있다. 현재 이 서비스에 가입한 사람은 2백70만명에 달하는데, SK텔레콤이 2백만명, KTF가 65만명, LG텔레콤이 5만명쯤 된다.

기자가 직접 위치 정보 서비스를 시험해 보았다. 먼저 휴대전화로 ‘친구 찾기’라는 서비스를 신청했다. 신청료는 월 5백원. 동료 기자의 허락을 받아 그의 휴대전화 번호를 기자의 명단에 올렸다. 위치 조회를 요청하자 답신이 오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님의 현재 위치는 서울 중구 정동 부근입니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회사 인근 빌딩에 붉은 십자 표시가 보였다. 휴대전화보다 인터넷으로 조회하면 좀더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이동통신회사 사이트에 들어가 위치 정보를 조회하니 동료 기자가 편집국 북쪽 한 식당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차는 20m였다. 물론 이 조회는 동료 기자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졌다. 이동통신 회사측은,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위치 정보를 알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동의’라는 절차가 복잡한 것이 아니다. 당사자 휴대전화를 통해 위치 정보 조회를 허용하면 된다. 굳이 상대 휴대전화를 훔쳐오지 않더라도 단말기를 복제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휴대전화 불법 복제 엄청나게 많을 듯

휴대전화 복제의 역사는 위치 정보 서비스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모든 휴대전화에는 헥사번호라고 불리는 고유 번호가 있다. 이 고유 번호만 알면 대리점에서 똑같은 단말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똑같은 휴대전화 2대가 시중에 나돌 경우, 한쪽이 통화를 하면 다른 쪽 단말기는 먹통이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복제 휴대전화를 짧게 사용한 뒤 꺼버리면, 피해자들이 자기 휴대전화가 복제된 사실을 알아채기는 거의 힘들다. 천개가 넘는 휴대전화가 복제되었지만 이동통신 3사는 복제 신고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그동안 휴대전화 복제에 따른 문제는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9월23일 정통부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은 “9월18일 정통부와 전파연구소가 벌인 실험에서 기지국 반경 20m 안에 복제 휴대전화와 진짜 휴대전화가 같이 있을 경우 도청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다음날 정통부는 ‘휴대전화 제조 공정을 모르면 복제는 불가능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하루 뒤에 검찰이 밝힌 이번 사건은 정통부의 발표를 무색하게 한다.

원래 헥사 번호는 애프터서비스센터 소장이나 영업소 소장 수십 명만 조회가 가능하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실제로는 일반 사원도 편의상 조회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헥사 번호를 조회한 로그 기록 자체가 없어서 누가 조회했는지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이번 범행에는 SK텔레콤 대리점 직원 최 아무개씨(29)와 SK텔레콤 중부지부 A/S센터 직원 고 아무개씨(30)가 개입했다. 이들은 모두 구속되었다. SK텔레콤측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일반 사원의 헥사 번호 접근 권한을 빼앗았다고 밝혔다.

범인 일당은 SK텔레콤 외에 다른 PCS 휴대전화를 복제하는 데는 좀더 복잡한 방법을 사용했다. PCS 단말기 일련 번호를 헥사 번호로 바꾸어 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것이다. 단말기 일련 번호는 휴대전화 배터리를 열면 뒷면에 적혀 있는 것인데, 규정상 비밀이 아니어서 누구나 조회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모든 PCS폰이 가능한 것은 아니고, 특정 회사의 특정 휴대전화만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춘천지검 원주지청 곽규홍 부장검사는 “한 업소에서만 천여 명의 휴대전화가 불법 복제된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는 엄청난 규모로 휴대전화 불법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위치 정보 서비스와 연결되면 윤락녀·채무자 추적뿐만 아니라 청부 폭력 등 다른 범죄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대책은 없을까? 지금이라도 이동통신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자기도 모르게 ‘친구 찾기’ 서비스에 가입되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 누가 언제 자신의 위치 정보를 조회했는지 파악해야 한다. 가장 안전한 것은 위치 정보 서비스를 해지하는 것이다.
이동통신 3사가 ‘친구 찾기’ 서비스를 통해 얻는 수익은 연간 40억원이 넘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