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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러시아 박사' 함량 논쟁

칸지다트 학위 성격 놓고 국내파·유학파 갈등

朴晟濬 기자 ㅣ | 승인 1995.06.0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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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학연·지연에 얽매여 생산적인 논쟁보다는 파괴적인 헐뜯기와 상대방 깎아내리기를 거듭하는 학계의 고질은 언제쯤 막을 내릴 것인가. 또 학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 학문적 업적이나 실력보다 간판이나 학위를 더 중시하는 풍토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최근 학계에는 얽히고 설킨 이해 다툼 난맥상에, 과거에는 볼 수 없던 낯선 형태의 학맥 시비가 새로 추가되어 문제로 등장할 조짐을 보인다. 옛 공산권 나라, 특히 러시아에 유학했던 사람이 하나 둘씩 귀국해 국내 대학 강단이나 학계에 자리잡으면서 이들과 학문적 배경, 학위를 취득한 과정, 방법론, 인맥 구조가 확연히 구별되는 기존 국내파·구미 유학파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전선은 러시아 어학 또는 문학 분야에 형성되어 있지만 머지않아 정치학·경제학 등 다른 학문 분야로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발단은 러시아의 특수한 학위 명칭으로 국내의 박사와 석사 중간에 해당하는 `‘칸지다트’의 위상과 그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박사·석사 중간 단계 학위일 뿐”

대학 사회 구성원을 주요 독자층으로 겨냥해 발행되는 〈교수신문〉(발행인 이영수·경기대 교수)에는 최근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러시아에 유학중이거나 유학을 마친 사람들이 매우 민감하고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내용의 기고문이 한 편 실렸다. 이 기고문은 현재 학술원 회원으로서 국내 러시아 어학계의 원로이자 러시아 어학의 1세대 대표 격인 동 완씨가 쓴 것으로, 주로 러시아의 학위 수여 제도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주요 내용은 ‘러시아 각 대학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칸지다트 등 각종 학위를 남발하고 있다. 러시아로 간 한국 유학생의 상당수가 이처럼 진실성이 의심되는 학위를 받고 돌아와 정식 박사인 양 행세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동씨는 기고문에서‘칸지다트로서 국내 학계에 진출하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학위의 미흡함을 깨닫고 국내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를 등록할 때 영어본만 제출해 박사 학위로 인정받은 뒤, 교수 공채 때 인증을 제출하는 식으로 문제점을 덮어둔다’며 일부 러시아 유학파가 학문적 양심을 속이고 편법마저 동원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동씨가 기고문에서 말한 칸지다트란 러시아 고등 교육 학제에서만 통용되는 고유한 학위 이름이다. 영어의 `‘캔디디트(candidate·후보)’로 번역되는 이 명칭은 러시아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 일명 `‘마기스투라’ 과정(2년)과 ‘`아스피란트’ 과정(3년)을 거친 뒤 국가에서 관장하는 인정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자격이다. 일단 칸지다트 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러시아의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될 수 있으며, `‘독토란투라’ 즉 박사 과정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말하자면, 칸지다트는 박사도 아니면서(박사 후보) 대학에서는 교수 노릇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자격인 셈이다.

동 완씨의 기고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칸지다트 자격이 현재 러시아의 분위기상 아무나 쉽게 취득할 수 있으며, 엄밀하게 보자면 박사 학위가 아닌데도 국내에서는 박사 학위로 통용된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말하자면, 질적 수준이 의심되는 학위이므로 외국에서 따온 학위라 하여 무비판적으로 선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같은 주장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칸지다트 과정이 다른 외국의 박사 학위 취득 연한에 비해 짧다는 점을 들고 있다. 동씨는 ‘미국·일본의 대학에서 제대로 절차를 밟아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짧게 잡아도 10년 가까이 걸린다. 그런데 최근 학위를 딴 뒤 국내에 돌아오는 러시아 유학생들의 유학 기간을 살펴보면 거의가 2~3년이다. 10년짜리 학위와 2~3년짜리 학위의 질적 수준을 동일하게 취급하면 곤란하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러시아에 유학해 칸지다트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것이 박사 학위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엉터리나 다름없다’고 취급하는 것은 러시아 고등 교육 체계의 특수한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거나, 불순한 의도를 깔고 사실을 곡해하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대학 출신으로, 올봄 교수 임용 과정에서 중앙대 러시아어과에 자리를 잡은 김세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독토르’ 즉 박사가 되기 위한 자격은 극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경력이 많은 교수라 하더라도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입증하지 못하면 학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박사 학위를 해외 유학생에게 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반면 칸지다트는 박사가 아니지만 시간 강사와 전임 강사는 물론 조교수·부교수에까지 임용될 수 있다. 실제로 국제 학계에 잘 알려진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러시아 문학과 교수 25명 가운데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는 5명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모두 칸지다트라는 것이 이 대학에 유학했던 또 한사람의 현직 교수인 함영준씨의 설명이다. 결국 칸지다트를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해 `‘박사 후보’로 받아들이면, 그 용어에 포함된 실제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전혀 다른 뜻의 용어로 오해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러시아 유학파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또 하나의 쟁점은, 칸지다트가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쉽게 딸 수 있는 학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 유학중인 심아무개씨의 설명에 따르면, 유학생이 칸지다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6개월~1년 어학 교육을 받은 뒤 언어 구사 능력을 검증 받아야 한다. 언어 구사 능력을 인정 받지 못한 학생은 입학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또 마기스투라와 아스피란트를 이수한 뒤에도 철학과 러시아어, 그리고 각종 전공 과목이 포함된 국가 시험에 통과해야 하며, 논문까지 제출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학위 관리를 대학이 아닌 국가가 직접 관장하므로 대학 당국이 편법을 동원할 길은 원천 봉쇄된다는 것이다.

‘위기 느낀 국내파들의 흠집내기’ 비판도

물론 러시아 유학파 중에서도 똑같은 칸지다트 학위라도 질적으로 균일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옛 소련에서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이 시작되고, 곧 이어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고등 교육 체계마저 큰 혼란을 겪는 과도기 상황에서 일부 약삭빠른 유학생들 또는 학위 걸식증에 걸린 인사들이 러시아에 건너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칸지다트를 받고 돌아온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러시아 전문가는 “물론 지금은 달라졌지만, 혼란기 때 러시아에서는 학위 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국내의 한 교수는 러시아어를 한마디도 못했는데도 러시아 대학에서 어학 관련 논문이 통과돼 학위를 취득해 온 경우도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전문가는 “열심히 정상적으로 공부해 칸지다트를 취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분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현재 러시아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은 약 1천5백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에서 칸지다트 학위를 갖고 대학에 들어가 교수로 재직중인`‘본격 러시아 유학파’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이들을 비롯해서, 러시아에 유학중이거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칸지다트에 대한 일부 냉정한 평가에 다분히 계산된 `‘의도’가 깔려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과거 러시아 어학·문학·정치경제학 등 러시아 관련 학문을 전공하면서도 정치적·외교적 장벽 때문에 러시아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본바닥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차츰 늘자 학문적 정통성과 기득권 면에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이들에 대해 미리 흠집 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현지의 유학생 실태와 국내 학계의 움직임 양쪽을 잘 아는 한 러시아 전문가는 “러시아 대학들의 학위 관리, 한국 유학생들의 태도에 전혀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학계, 특히 어문 계열에서 똑같은 학문 분야를 전공했어도 러시아 유학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벌어지는 논란의 상당 부분이 이와 관련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논쟁의 주안점은 누가 어떤 곳에서 어떤 학위를 땄는가 하는 문제에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의 실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가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문제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쟁은 자칫 학맥이나 파벌의 기득권 싸움으로 변질될 공산이 크다. 칸지다트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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